[BOOK북카페] 고어의 부시 때리기 … “TV로 여론 조작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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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이성의 위기
앨 고어 지음, 안종설 옮김
중앙북스, 384쪽, 1만6000원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나섰던 앨 고어 당시 부통령은 TV토론에서 달변을 자랑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등을 돌렸다. 잘난척 하는 모양새가 얄미워서다. 결국 식견은 없어 보였지만 소탈한 태도로 토론에 임한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가 대권을 거머쥔다.

2007년. 고어는 새로 낸 저서 『이성의 위기』에서 또 한 번 달변을 선보인다. 그러나 7년 전과 달리 어깨에 힘을 빼고 아주 호소력있는 주장을 펼친다. 고어를 봐도, 버락 오바마를 봐도 어째서 미국에는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정치인들이 많을까 한숨이 난다.

책은 거짓말과 공갈로 국민과 세계를 오도한 조지 W 부시 대통령 행정부의 만행을 고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2003년3월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침공을 명령했을 때, 미국인 열 명중 일곱 명은 사담 후세인이 9·11 테러를 사주했다는 부시 행정부의 거짓말을 그대로 믿었다. 이는 미국인들의 의사소통구조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고어는 진단한다. 즉 권력과 돈으로 텔레비전을 장악한 기득권층은 일방향 매체인 텔레비전의 특성을 이용해 이성과 토론을 건너뛰는 방법으로 여론을 조작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기득권층이 이성을 공격하는 최고의 무기는 공포와 사술이다. 부시 행정부는 아무 근거 없이 사담 후세인과 9·11을 연계시켰고, 정보 관리들에게 있지도 않은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증거를 ‘만들어 오라’고 강요했다. 부시 행정부가 고용한 홍보전문가들은 텔레비전 소유주들과 결탁해 미국인들에 끊임없이 테러공포증을 주입했다.

진실을 파헤치려는 언론에는 대통령의 통치행위란 명분 아래 ‘비밀주의’를 내세워 정보접근을 완벽히 차단했다. 이런 공포체제가 부시 행정부 내내 지속되면서 권력은 소수의 기득권층에 더 큰 부와 힘을 몰아줬다. 그 결과 미국은 금융위기로 상징되는 국내 시스템의 붕괴와 국제적 리더십의 상실속에 허덕이게 됐다.

고어는 이성을 회복하고 미국의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대안으로 인터넷에 초점을 맞춘다.

아직 인터넷이 텔레비전의 지위에 필적하지는 못하지만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매체란 점에서 국민들이 권력의 의사결정에 다시금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이 같은 주장에 비판도 만만치않다. 고어가 되살려야한다고 주장하는 ‘이성적 세계’란 가족과 친구·이웃 등 살아 움직이는 관계는 배제한 채 얼음 같은 ‘공인’들이 정보를 교환하고 토론을 거쳐 합의에 도달하는 일종의 정치공학적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중 속으로 다가가기 보다는 대중들 앞에서 ‘나를 따르라’고 외치는 데 익숙한 엘리트 정치인의 한계라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속한 미국 기득권층의 권력 독점과 탐욕을 투명하게 까발리고, 대중의 참여권이 보장된 민주주의의 회복만이 미국의 살 길이라고 묘파하는 고어의 주장은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부통령 재임 8년의 경험과 엄청난 독서량을 바탕으로 저술된 이 책은 실감나는 예화와 독설을 곳곳에 녹여 ‘부시 때리기’라는 닳고 닳은 주제에 새로운 흥미를 불어넣었다. 원제 『The Assault on Reason』. 

강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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