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族들, 전자생명체 애완동물에 푹 빠져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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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경남 합천에 사는 스물두살짜리 총각 허태민씨는 요즘 퇴근하기가 무섭게 집으로 돌아간다.혼자 사는 총각인 그를 반겨줄 사람은 물론 아무도 없다.방안에 들어가면 그는 곧바로 PC의 전원을 켠다.

“파랑아 나야,나 왔어.”

돌고래처럼 생긴 새 한마리가 허씨의 음성을 알아듣고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이젠 제법 주인을 알아본다.기특하고 대견하다.허씨가 밀린 공부며,집안일을 하는 동안 파랑이는 제맘대로 화면속에서 뛰어놀다간 때때로 갸웃갸웃 고갯짓을 하면서 주인의 모습을 지켜본다.왠지 든든한 느낌이다.

쌍방울 모방사업부에 근무하는 허씨가 버추얼 페트(Virtual Pet,또는 Cyber Pet:컴퓨터속의 애완동물)인 ‘파랑이’를 구입한 것은 보름전.처음엔 낯가림이 심해 불러도 도망가고 자칫 큰소리라도 나면 아예 숨어버리곤 했다. 사이버스페이스에 비라도 오는 날 혼자 감상에 젖는듯한 모습일 때, 안쓰러운 마음에 먹이라도 줄라치면 받아먹을 생각조차 안해 허씨의 속을 태우기도 했다.

허씨는 파랑이라 부르지만 이 전자 애완동물의 원명은 ‘핀핀’(Fin Fin)이다.일본 후지쓰사가 6년간 연구끝에 내놓은 “테오 행성의 핀핀”이란 CD롬 타이틀의 주인공이다.핀핀은 인공지능·인공생명 기술과 주변환경에 적응시키는 기술(Life Engine)등을 결합해 개발한 전자생명체로,사용자의 음성과 움직임을 센서를 통해 감지하고 자율적으로 반응한다.국내에는 한서미디어(02-266-5206)가 지난달 1백개를 수입,판매했는데 곧바로 매진돼 이미 2차분 2백개를 추가로 수입 신청해 놓고 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일본의 반다이 디지털 엔터테인먼트사가 만든 사이버 병아리 ‘다마곳치’가 있다.‘가지고 다니는’ 전자생물이라는게 핀핀과 다른 점.달걀 모양의 몸체에 네모난 액정화면과 3개의 조작 버튼만이 달려 있는 이 전자장난감은 지난해 11월 출시되자마자 일본열도를 들끓게 했다.3월말 현재 추정 판매량만 2백70만개.물건이 달려 암시장에서 원래 가격(약 1만6천원)의 20배 이상 비싸게 암거래되고 있을 정도다.

다마곳치는 주인의 끊임없는 애정과 관심을 먹고 사는 ‘생물’이다.먹여주고 씻어주고 놀아주고 꾸짖기도 해야 하며 예방접종까지 해줘야 한다.주인의 성향과 사육방법에 따라 크기와 성격·모습이 달라지며 돌보지 않으면 죽고 만다.이 병아리를 주머니에 넣거나 목에 걸고 다니는 일본 여학생들이 자신이 키운 것과 남의 것을 비교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놀이법과 육아법 책까지 나왔고 인터넷에는 죽은 다마곳치의 영령을 모시는 절까지 등장했다.

심리학자들은 이같은 전자생물 선풍의 원인을 현대인이 처한 상황에서 찾는다.애완동물은 커녕 인간끼리 살기에도 비좁은 공간.자신을 가꿀 시간조차 모자라는 바쁜 생활.그래도 사람들은 애정을 줄 대상에 목마르게 마련이다.일본인들이 그 전형이다.다마곳치는 그래서 인기라는 것이다.

다마곳치의 2탄격인 ‘공룡 키우기’가 이달 중순께면 한 수입상에 의해 ‘헬로마미’란 이름으로 국내에 선보일 예정이다.한국에도 전자 애완동물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현재 나와 있는 전자 애완동물은 20여종.주로 미국과 일본 제품이다.바이컴 뉴미디어사의 ‘버추얼 다이내소어’는 전자 애완공룡이다.PF 매직사에서 지난해 11월 내놓은 전자 개와 고양이는 지금까지 10만마리가 넘게 팔렸고 워싱턴 포스트지에도 소개됐다.

프로그램 기획자 롭 프롭은 “이들은 생각하고 대답하는 감정의 동물이다.컴퓨터속에서 실제로 살아 있는 생명체를 기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이 전자 개와 고양이는 학습이 가능하고 예상 밖의 행동을 하도록 설계돼 애완용으로서의 독특한 맛을 가진다.

샌프란시스코의 나 소프트웨어사가 개발한 ‘슈퍼 완찬’은 개모양의 전자생물체며, 후지쓰사가 3D입체화면으로 강아지가 크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게 만들어낸 ‘K-9 사이버 컴패니언’은 진짜 개를 훈련시키는 느낌을 맛보도록 설계됐다.

이들은 대부분'성장형'전자생물로 주인의 관심과 애정에 따라 크기나 성격이 변하는 애완동물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다.이들은 또 컴퓨터상의 실제 시간에 따라 낮에는 놀고 밤에는 자는'자신만의 생활'을 한다.제작사들은 이런 가상생물들이

공간과 시간에 제약을 받는 현대인에게 안성맞춤이라고 강조한다.

또 관심과 애정으로 전자생물을 키워본 경험이 진짜 애완동물을 갖고 싶은 욕구를 부추긴다고 주장한다.이들의 주장이 아니라도 최소한 폭력.음란 컴퓨터게임에 비해 전자생물이 훨씬 정서적이란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과 앨런 케처 교수는 전자 애완동물을 주제로 한 워싱턴포스트지와의 인터뷰에서“냄새가 없고 담요도 더럽히지 않아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이 가상생물이 일시적으로 유행하는데 그치지 않고 살과 피를 가진

애완동물의 자리를 영원히 빼앗으리라는 두려움이 생긴다”고 밝혔다.

인터넷에는 가상동물 묘지가 만들어져 5만여명이 자신의 숨진 애완동물을 기리는 묘비명을 새겼다.일본의 카시오사는 지난해 계산기 액정화면에서 키우는 전자개를 내놓기도 했다.곧 누구나 전자수첩에 애완동물 한마리쯤 갖고 다니는 시대가 올

지 모른다.그때는 가짜와 진짜를 구별할 수 없는 애정이 곳곳에 둥둥 떠다니게 될지도 모른다.

<이정재.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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