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Style] ‘바 재킷’ 발표 60년 … 파리의 부활을 알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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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 디올의 ‘뉴 룩’ 대표작이다. 1947년 프랑스 파리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뉴 룩’에서 가장 전형적인 재킷과 치마 차림(上)의 모델은 동양적 분위기의 모자로 멋을 냈다. 에펠탑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모델은 새틴 소재의 ‘뉴 룩’드레스를 선보였다. 위 사진보다 재킷의 허리 아랫부분이 조금 더 긴 것이 특징이다. [디올 제공]

 1934년부터 25년간 미국 잡지 ‘하퍼스 바자’의 편집장으로 일했던 카멜 스노는 47년 프랑스 출신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이 프랑스 파리에서 발표한 첫 작품을 ‘뉴 룩(new look)’이라 불렀다. 새로운 형태의 의상 어디에나 붙일 법한 이름이지만 이 단어는 오직 디올의 작품에만 고유 명사처럼 따라 다닌다. 늘 새로운 것을 내놓는다 자부하는 다른 패션 디자이너들이 부러워할 일이지만 스노의 작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나 미술가 앤디 워홀, 작가 트루먼 카포티, 장 콕토 등을 발굴한 스노의 영향력 때문일까. 정작 디올 자신은 ‘바 재킷’이란 이름을 붙였건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옷을 ‘뉴 룩’이라 부르고 있다. 지난해 발표 60주년을 맞은 ‘뉴 룩’은 현대 여성 패션의 역사로 남아 여전히 복제되고 있다. 지난달 16일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이를 기념하는 전시회도 개막했다. 베이징 시내 유명 화랑과 갤러리가 모여 있는 다샨즈 ‘798 예술구’ 내의 ‘울렌스 현대 미술관’에서 다음달 15일까지 열리는 ‘크리스찬 디올과 중국 작가전’이다. ‘뉴 룩’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60년도 더 지난 지금에도 현대 미술의 모티브가 되고 있는 걸까. ‘뉴 룩’과 현대 여성 패션의 관계를 살펴봤다.

강승민 기자

 ◆파리가 다시 ‘세계 패션의 심장’이 되기까지=누구나 프랑스 파리를 패션의 수도로 알고 있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파리는 그 지위를 잃었다. 모든 물자가 전쟁에 동원됐기 때문이다. 파리의 명성을 복원한 것은 ‘뉴 룩’이었다. 패션 칼럼니스트 프랑수아 바도는 저서 『20세기 패션』에서 “크리스찬 디올의 ‘뉴 룩’이 파리에 ‘세계 패션의 심장’이라는 제 위치를 다시 찾아줬다”고 평했다. 이야기의 맥락은 이렇다.

지금이야 자원이 풍족해 그럴 일이 없지만 20세기 초만 해도 사회·경제적인 여건은 늘 패션 디자이너의 창작 욕구를 제한했다. 의상이 시대상을 반영하는 이유다. 따라서 의복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면 혹은 비단의 생산량에 따라 유행이 바뀌는 것은 당연했다.

일반인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패션 디자이너에게도 가장 가혹한 시절은 제2차 세계대전 때였다. ‘세계 패션의 심장’ 또는 ‘세계 럭셔리의 수도’라는 프랑스 파리도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급기야 프랑스 정부는 의복에 쓰이는 원단의 양까지 통제했다. ‘여성용 드레스에는 몇 m 이상의 원단을 쓰지 말 것’ 등등의 지침이 내려졌다. 파리 패션을 전 세계에 소개하던 디자이너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당대의 주축 디자이너였던 마들렌 비요네는 1939년 은퇴했다.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가브리엘 샤넬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파리 중심가 매장만 남기고 모두 문을 닫았다. ‘파리=패션’이란 이미지는 퇴색했다.

나치는 아예 계획적으로 파리의 명성을 빼앗으려고 했다. 37년부터 파리의상조합 회장을 지낸 패션 디자이너 루시앙 르롱이 쓴 『1940년부터 44년까지 프랑스 패션 보고서』에 따르면 나치는 고급 맞춤복인 ‘오트 쿠튀르’를 만드는 패션 디자이너와 장인들을 오스트리아 빈과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시키려 했다. 세계 패션의 주도권을 옮기려던 야심 찬 계획이었다. 물론 이 계획은 나치의 패전과 동시에 무산됐다. 하지만 이 일화는 프랑스 패션이 전쟁 이전까지 얼마나 확고한 지위를 점했으며 동시에 전쟁 기간 중 얼마나 명성이 퇴색했는지를 잘 알려준다. 그렇다면 ‘뉴 룩’의 무엇이 파리에 명성을 되찾아 주고 현대 패션의 변화를 이끌었을까.


전쟁이 앗아간 여성성의 부활=‘뉴 룩’의 모양은 이렇다. 어깨선을 과장하지 않고 둥글린 모양으로 어깨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소매가 연결되는 모양새다. 재킷의 가슴선은 봉곳하게 올렸다. 바로 아래 이어지는 허리선은 ‘크리놀린’을 연상케 할 만큼 잘록하다. 크리놀린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비비안 리가 유모의 도움을 얻어 입었던 드레스처럼 허리를 꽉 조여매고 바로 아래 이어지는 치마는 극단적으로 부풀린 형태를 말한다.

‘뉴 룩’ 재킷의 뒷단도 크리놀린처럼 패드를 넣어 살짝 솟아오르게 했다. 재킷은 치마 선을 따라 조화롭게 어울렸다. 19세기 중반 큰 유행을 했던 크리놀린을 닮은 허리선과 가슴 부위를 강조한 여성적 실루엣이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직전까지 유행했던 ‘밀리터리 룩’ 때문이다.

전쟁의 영향으로 여성들은 군복과 비슷한 옷을 즐겨 입었다. 어깨는 각지고 가슴 부위는 펑퍼짐했다. 여성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파리에선 ‘남자 같은 여자’라는 뜻의 ‘가르손(garconne·소년을 뜻하는 가르송을 여성형으로 바꾼 것)’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길 정도였다.

전쟁 직후 한동안 계속된 밀리터리 룩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100여 년 전 귀족 부인의 차림새를 현대로 이끌어낸 디올의 천재성에 놀랐다. 여성성을 한껏 이끌어 낸 새로운 의상은 상식도 뒤엎었다. 전쟁 동안의 물자 제한에 익숙했던 디자이너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천을 아껴 디자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디올의 ‘뉴 룩’ 한 벌에 쓰인 천은 약 20m였다. 대개 6~7m면 여성복을 만들던 때였다. 이런 옷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궁금했던지 ‘하퍼스 바자’는 옷의 재단 하나하나를 해부한 입체도까지 게재할 정도였다. 카멜 스노는 혁신적인 디올의 의상을 미국 소비자에게 적극 소개했고 할리우드 스타들이 그의 옷을 칭송했다. ‘뉴 룩’이 파리의 명성을 부활시킨 것이다.

원형은 끝없이 복제된다=중국의 현대 미술 작가 쉬중민(許仲敏)은 이번 전시에 60개의 마네킹이 끝없이 움직이는 작품을 선보였다. 강인한 남성의 육체는 벌거벗었다가 연속으로 움직이며 변형된 모습으로 다가온다. 점점 여성적인 모습으로 변해갈 무렵 마네킹이 입은 것은 디오르의 ‘뉴 룩’이다. 꽤 직설적으로 ‘뉴 룩’이 여성성을 회복시켰음을 주제로 내보이는 것이다. 크리스찬 디올사의 CEO 시드니 톨레다노도 “처음 발표했을 땐 (천을 너무 많이 썼다고 해서) 지나치게 소비지향적이란 비난도 받았던 게 ‘뉴 룩’이다. 하지만 할리우드 스타들과 유럽의 상류층 고객은 그의 옷이 진정으로 여성을 위한 것이란 걸 깨달았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첫 작품이 나오고 20여 년이 지난 60년대까지도 전 세계 패션은 여성적인 경향이 뚜렷했다. 디자이너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떻게 하면 ‘여성을 더 여성답게 보이게 할 것인가’에 골몰했다. 모두 ‘뉴 룩’의 영향이다. 디올의 뉴 룩은 97년 크리스찬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존 갈리아노에 의해서도 끊임없이 재해석 됐다. 하지만 잘록한 허리와 치마 위로 살짝 올라오는 재킷 뒷단의 볼록하고 앙증맞은 장식은 변함이 없다. 요즘 패션계에서 ‘천재’로 통하는 갈리아노조차 손대지 못할 만큼 뉴 룩의 영향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바 재킷(Bar Jacket)과 크리스찬 디올=‘뉴 룩’으로 패션 역사에 기록된 옷의 정식 명칭은 ‘바 재킷’이었다. 1947년 크리스찬 디올이 섬유업을 하던 마르셀 부삭의 투자를 받아 자신의 이름을 건 패션회사를 설립한 뒤 처음 연 패션쇼에서 발표했다. ‘바 재킷’은 이름 그대로 바에 갈 때 입는 옷이란 뜻이다. 당시 여성들은 상황에 따라 옷을 바꿔 입었다. 만찬장에는 성장을 하고 가더라도 바에 갈 땐 그보다 간편한 옷차림을 애용했다. 치렁치렁한 길이의 드레스보다는 지금의 양장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긴 길이의 옷이 이런 상황에 맞춘 옷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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