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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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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눈 내리는 풍경은 다양한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고향의 산과 들, 마을을 하얗게 뒤덮는 평화이거나 학창 시절 교정에 내리는 설렘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온 세상을 평등하게 덮어주는 위안이거나 시대의 불의와 상실감일 수도 있다. 시를 통해 우리는 각자의 마음에 존재하는 설경(雪景)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김정란 시인에게 눈은 영혼이 탄생한 시원의 공간으로 통한다.

“눈이 내리고/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맨발로/달려가는 소리를 듣는다/태초에, 우리가 꿈이었을 때/우리가 애벌레의 날개이며 봄의 움이며/신의 숨결이었을 때/그때,우리가 그렇게 작은 소리로 속살거렸듯이” (‘눈’ 중에서).

황동규는 눈보라 치는 밤에 기도한다. 그것은 떠나는 자이면서 여전히 당신과의 소통을 염원하는 자의 몸짓이다. “인적이 드문, 모든 것이 서로 소리치는 거리를 지나며 나는 단념한 여인처럼 눈보라처럼 웃고 있었다./…/당신이 나에게 바람 부는 강변을 보여주며는 나는 거기에서 얼마든지 쓰러지는 갈대의 자세를 보여주겠습니다.” ( ‘기도’ 중에서).

눈의 연가집 ‘설연집’을 쓴 강우식은 사랑하는 여인을 떠올린다.

“사랑하는 사람아, 눈이 풋풋한 해질녘이면/마른 솔가지 한 단쯤 져다 놓고/그대 방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싶었다/저 소리 없는 눈발들이 그칠 때까지….” (‘설연집 3’ 전문).

설경에 낭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호승에게 그것은 세상을 동일한 색으로 덮어주는 일시적인 평등이자 위안이다. “눈이 오는 날이면 아버지는/가난하였으므로 행복하였다/빚잔치를 하고 고향을 떠나/숟가락도 하나 없이 식구들을 데리고/믿는 도끼에 찍힌 발등만 바라보며/내 집 한 칸 없이 살아오신 아버지/눈이 오는 날이면 언제나/가난하였으므로 행복하였다” (‘아버지’ 전문).

이시영은 불의에 스러져가는 시대의 뭉클함을 전한다.

『아무도 살지 않는 나라에/눈이 내린다/알지 못할 한마디 맹세가/시퍼렇게 떨다가 스러지고/…/누구도 들을 수 없는 나라에/소리가 내린다/소리 뒤에 주먹처럼 고요히 내린다/…/잃어버린 자들의 가슴에 뭉클한/손이 내린다』 ( ‘눈이 내린다’ 중에서).

또다시 눈이 내리면 우리는 무엇을 떠올릴 것인가. 각자가 마음속에 간직한 설경일 것이다. 교통체증만이 아니라.

조현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