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임.직권남용죄 적용 파문 - 한보관련 행장.前수석들 처벌여부 관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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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검찰은 한보그룹 대출에 개입한 은행장들과 한이헌(韓利憲).이석채(李錫采)전경제수석등 관계(官界)인사들에게 업무상 배임 또는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하는 방안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

한보사건이후 분노한 여론을 감안하면 법원에서 무죄가 나더라도 적극적으로 법적용을 해야 마땅하지만 현 경제상황을 고려하면 마음대로 칼을 휘두를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다.더구나 관계와 금융권의 반발이 만만치 않아 과연 검찰의도대로 밀어붙일수 있을지 주목거리다.

심재륜(沈在淪)검사장으로 팀장이 바뀐 대검 중수부는 은행관계자 30여명을 소환하는등 제일 먼저 은행의 부당대출 경위에 수사의 초점을 맞췄다.김상희(金相喜)수사기획관은 재수사 착수초기“은행감독원 특검결과를 조사해보니 일부 은행장들이

여신관리 규정을 무시하고 한보철강의 담보능력등을 소홀히 했다는 의심이 간다”며 은행 관계자의 업무상 배임혐의를 비췄었다.이후 검찰은 업무상 배임및 직권남용죄에 대한 판례를 수집하는등 법률검토까지 마쳤다.

검찰 스스로도 어려움을 인정하고 있다.게다가 지금까지의 판례도 업무상 배임죄 인정에 매우 인색한 편이다.율산그룹 부도사건 당시 이 혐의로 구속된 홍윤섭(洪允燮)전서울신탁은행장이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는등 업무상 배임죄는 검찰이 공소유지하기 어려운 죄목중 하나다.

그러나 현재 벼랑끝에 몰려있는 검찰 입장에선 판례만 들먹이며 뒷짐만 지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한 검찰 관계자는“한보사건이후 검찰만 욕을 먹었으나 부도사태 원인을 따져보면 은행과 정책결정자의 책임이 더 크다”며“법원에서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적극적으로 법 적용을 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한보대출이나 인.허가 과정에 개입한 공무원을'직권남용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얘기가 검찰에서 흘러나오자 과천 경제부처가 크게 반발하고 있다.

한 공무원은“한보뿐 아니라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사안에 대해 정부의 판단이 필요하다”며 “직권 남용죄로 걸기 시작하면 정책을 하지 말라는 얘기”라고 말했다.

이들은 한이헌.이석채 전 경제수석이 한보대출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돈을 받았다면 당연히 처벌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하지만 한보를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게 우리 경제를 위해 낫다는 순수한 정책적 판단아래 개입했다면 처벌해선 안된다는 입장이다.

더욱이 중요한 정책을 판단할 위치에도 있지 않은 공무원들마저 직권남용죄로 몰아붙이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재정경제원 관계자는“청와대비서관 얘기가 자꾸 나오는데,한보와 관련해 돈을 받았다면 처벌받아야 겠지만 윗사람 지시에 따랐다면 남용할 직권자체가 없었던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이 철저한 공무원사회에서 이같은 일을 나중에 잘못으로 몰면 앞으로 누가 지시를 따르겠느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예컨대 원화값 급락을 막기 위해 정부가 개입하면 직권남용죄가 되고,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직무유기가 되는 것이냐는 반문이다.다른 공무원은“앞으로 어느 공무원이 책임이 따를 결정을 하겠느냐”고 말했다.

공무원들의 복지부동(伏地不動)은 이미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다.먼저 일을 벌이기 보다 시키는 일만 하고,골치아픈 보직을 회피하고,입조심.행동조심이 극에 달해 있다.

업무상 배임죄에 대한 금융권의 반발은 즉각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만약 검찰이 배임죄로 처벌을 강행할 경우 금융이 크게 위축될 전망이다.그래도 담보가 있는 대출은 은행에 손실이 별로 없지만 신용대출은 떼이면 그대로 은행손실로 이어

져 형사처벌까지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담보대출과 신용대출이 절반정도인 금융현실을 감안하면 업무상 배임죄 적용이 남용될 경우 금융이 마비될 것이란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은행원이 뇌물을 받고 부실대출해줬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뇌물을 받지 않은 경우가 문제다.논리적으로는 뇌물을 받지 않았어도 한보대출로 제3자(예컨대 鄭泰守총회장)는 이득을 보고 은행은 손실을 보았으니 처벌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법률전문가들은 이 경우 은행직원의 고의성이 입증돼야만 처벌이 가능할 것(李茂相변호사)으로 보고 있다.즉 처음부터 은행이 뻔히 손해볼 것을 알면서 한보에 뭉칫돈을 내줬다는 사실이 입증돼야 한다는 것이다. 〈손병수.정철근 기자〉

<사진설명>

휴일에도 출근

한보비리 재수사 10일째인 30일 대검 중앙수사부 수사팀이 일요일임에도 불구,대부분 출근해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가운데 제일은행 관계자들이 중수부 조사실로 들어가고 있다. 〈김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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