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속으로>록카페 '고구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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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한떼의 젊은이들이 고구려에서 춤을 춘다.때는 5세기 전후.장소는 한반도가 아니래도 좋았다.한강 이북에서 무용총(舞踊塚)이 자리한 만주 지린(吉林)성 지안(集安)현 그 너머까지,그 춤의 스텝과 가락은 알길 없지만'가무를 즐겨 밤에는

부락마다 남녀들이 떼를 지어 노래하며 춤추더라'는 고구려 사람들 소문은 중국 역사서에 자취를 남길 정도였다.

지금 역시 한떼의 젊은이들이'고구려'에서 춤을 춘다.20세기 서울의 압구정동과 신촌에서 말이다.지극히 한국적인 이름임에도 이 집의 먹을 것과 마실 것에는 녹두지짐이나 막걸리.작설차의 흔적은 없다.다국적인 맥주와 양주.안주도'베이컨

양송이볶음''노가리튀김'처럼 무국적이다.음악 역시 최신 대중가요와 팝송의 리믹스 버전.'고구려'의 정체는 바로 흔히 아는 이름으로는 록카페(사진),구색이 아니라 정말 끼니가 되는 밥까지 판다고 해서 자칭 펍 바(Pub Bar

)다.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의 매력은 누구나 다 안다.광개토왕(廣開土王)의 이름 그대로 대륙으로 쭉쭉 뻗어나가던 나라,수(隋)와 당(唐) 두 초강대국의 침략에 70여년 동안이나 당당히 맞섰던 나라.게다가 가무(歌舞)를 즐기는 사람들 품성

까지.그러나 록카페'고구려'를 찾은 사람들이 그런 역사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3대3 미팅중인 대학 1학년생들은 상대방의 파트너 지명순위가 알고싶어 눈치를 떠보고,20대 중반의 남자 두 사람은 자꾸 옆 테이블의 여자 두 사람을 흘끔거린다.그 너머 벽면에는 말을 타고 사슴과 호랑이를 쫓는 사내들이 그려져 있다

.구불구불 주름잡힌 산세(山勢)가 훌쩍 달리는 사슴보다 작다.마치 도안처럼 그려진 그 모양이 오히려 친근하다.현대적이다.

룰라의'튕겨 튕겨'하는 후렴구에 몸을 맡기면서도 시선은 여러 곳을

더듬는다.소위'물'을 보는 것일까.시선을 사로잡는 한쌍의 남녀가

준(準)무대로 만들어진 계단위로 올라선다.그네들의 제법 폼나는 움직임 뒤편

벽에도 춤추는 사람들이

있다.땡땡이 무늬가 선명한 옷차림의 고구려여인들이다.근대회화식의

입체감은 아예 무시한 치마선이며 얼굴생김이 1천5백년의 시공을 뛰어넘는

현대적인 멋을 풍긴다.토굴처럼,무덤처럼 어스레한 조명까지 제격이다.

지난해 12월 압구정동(02-543-8443)과 신촌(02-313-9895)에 카페'고구려'를

차린 엄경아사장은 93년 국립현대미술관의 고구려고분벽화사진전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지나고 보니 고구려의 문양과 색상에서 놀랄만한

현대성을 발견한 것은 그 혼자가 아니어서,옷이나 도자기나 각 방면에 고구려

매니어가 작업을 하고 있더란다.

'고구려'는 한국적인 것,역사적인 것을 상업화한 성공적인 사례로

보인다.대화가 고구려사람들의 진취적인 기상을 닮은데로 나아가건

말건,손님들은 고분벽화속의 인물을 흉내내 만든 작은 장식용 토우(土偶)를

슬쩍 집어가는 것으로'고구려'를

동시대의 것으로 소유하고픈 욕망을 드러낸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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