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극단 산울림 '밤으로의 긴 여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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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최근들어 연극을 빙자한 음란물이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제목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유진 오닐의 명작'밤으로의 긴 여로'(6월22일까지 산울림소극장)도 이런 선의의 피해자중 하나.

연출자인 채윤일씨는“중년 목소리의 남자관객이 점잖게 극단으로 전화를 걸어'벗는 연극이냐'고 물은 뒤 아님을 확인하고 끊는 사례가 빈번하다”며 요즘의 세태를 한탄했다.

만약'딴 생각'있는 독자들을 위해 미리 말한다면 이 연극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어쩌면 따분하기까지 한 1910년대 균열된 미국 가정의 이야기.

오닐이 사후 25년내에는 공개하지 말라고 했던 이 작품은 그의 비극적 가족사와의 유사성과 인물에 대한 세밀한 접근으로 후세 사람들에게 오닐의 자전적 작품으로 읽히고 있다.이 작품이 국내 초연된 것은 미국 초연 6년뒤인 62년이었다

.우리나라 신극계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해랑 선생이 출연.연출했다.그뒤에도 이 작품은 여러차례 공연되면서 사실주의 연극의 전범(典範)으로 군림하며 연극을 공부하는 사람들의'교과서'가 됐다.산울림의 이번 무대는 이해랑 선생의 마지막 제

자라 할 수 있는 대표 임영웅씨가“언젠가는 추모공연을 하겠다”던 숙원을 이룬 것.연출을 직접 하지 않고 역시 후배 채씨에게 기회를 줘 세대를 거쳐 유전(遺傳)하는 선.후배의 정을 느끼게 하고 있다.

처음 이 작품에 손을 댄 채씨는 일단 다소'파격적인'캐스팅으로 불안감이 없지 않았지만 재목으로 다듬는 능란한 목수의 솜씨를 과시하며 꽤 괜찮은 앙상블을 일궈냈다.늘 분수에 맞게 살라는 수전노 아버지 티로온(김종칠)과 마약중독자인

어머니 메어리(채진희),주색잡기에 능한 큰 아들 제이미(남명렬),결핵환자 차남 에드먼드(박지일),가정부 처녀(이국희)의 각기 분열된 성격들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면서 묘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이런 성격들의'유형화'가 잘 이뤄지지 않았다면 웬만한 관객이라도 꼬박 3시간을 앉아서 지켜보기는 쉽지 않다.단일 세트와 단조로운 조명,특별한 극적 반전이 없는 상황은(작품의 본래 의도인지 모르지만)질식 일보직전이기 때문.누구보다도

등장인물의 나이와 턱없이 맞지 않는 아버지역을 묵직하게 연기한 김종칠을 칭찬해주고 싶다. 〈정재왈 기자〉

<사진설명>

티로온 가족은 오히려 가족으로서의 사랑때문에 증오의 터널을 벗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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