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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일본인 마음 바꾼 배용준의 '겨울연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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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 일본인들이 도쿄 중심지 긴자 거리에 등장한 겨울연가 관련상품 특판코너를 둘러보고 있다. 진열된 상품 위로 최지우와 배용준이 등장하는 드라마 포스터가 걸려 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지난 22일 오후 10시. 평양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와 납치피해자 가족 5명의 소식을 내보내던 일본 NHK방송에 전화가 빗발쳤다. 납치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후유노 소나타'(드라마 '겨울연가'의 일본 제목으로 겨울의 소나타라는 뜻)를 틀어달라"는 전화였다. 새벽까지 3000여통이 왔다.

보도특집으로 이날 오후 11시10분으로 예정됐던 겨울연가의 방영을 취소한다는 자막이 10시쯤 나가자 시청자들의 항의전화가 쇄도한 것이다. NHK의 한 관계자는 "'새벽까지 기다릴 테니 틀어만 달라'는 시청자들의 요구를 들으며 새삼 이 드라마의 파괴력을 느꼈다"며 "프로야구 최대 라이벌인 요미우리와 한신의 경기 중계를 중간에 끊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놀라워했다.

지난 28일 도쿄(東京) 한복판인 긴자(銀座)의 주오(中央)거리에는 겨울연가의 주제가가 흐르고 있었다.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음반.영상물 가게인 야마노(山野)악기가 겨울연가 코너를 별도로 마련해 TV영상과 함께 주제가를 1주일 내내 하루종일 틀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연가의 CD.DVD는 물론이고 엽서.편지지 등 온갖 관련 상품들이 날개돋친 듯 팔리자 이 코너를 아예 전진 배치했다. 점원인 오노즈카 미리(小野塚美里)는 "20~60대 여성고객은 열 중 아홉이 이 코너에서 발길을 멈춘다"며 "요즘은 중년 남성까지 가세했다"고 말했다.

일본 재계의 총수로 불리는 오쿠다 히로시(奧田碩.72) 게이단렌(經團連)회장 겸 도요타 회장. 열렬한 겨울연가 팬인 그는 도요타 관계자나 경제단체 간담회 자리에선 어김없이 겨울연가 예찬론을 꺼낸다. 심지어 상대방이 "아직 안 봤다"고 하면 "그것도 안 보고 뭐 하냐"며 면박도 준다. 그는 한국 영화에도 관심이 깊어 지난 21일에는 게이단렌 회관에서 '실미도'의 시사회를 열도록 직접 지시하고 본인도 관람했다.

겨울연가 붐은 주인공인 배용준의 신화탄생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용 사마(樣)'로 불린다. '사마'란 말은 '상(씨)'보다 한 격 높은 호칭으로 왕족 등 '숭배'의 대상에게만 붙인다. 최근에 '사마'란 호칭으로 불린 인물은 영국의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이 유일했다. 그러나 베컴도 요즘 배용준의 인기에는 못 미친다는 게 일본인들의 평이다. 지난 4월 배용준이 찾았던 도쿄의 한 카페에는 그가 주문했던 카푸치노와 망고치즈 케이크를 먹고자 평일에도 20~50대 여성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그의 헤어스타일을 본뜬 가발은 없어서 못 팔 정도다.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인도 급증하고 있다. NHK 교육방송의 한글강좌 교본은 지난 4월호의 경우 지난해 월 평균의 두배 이상인 20만부가 팔리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반 외국어 학원의 한글 강좌에도 20~50대 여성들이 몰려 한달가량 순번을 기다려야 할 정도다.

겨울연가는 2년 전 NHK 위성방송으로 처음 방영됐다. 이번이 세번째 방영이고 토요일 자정이 가까운 시간대인데도 여전히 15%대의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는 이유는 뭘까.

도쿄대 후카가와 유키코(深川由起子)교수는 "일본인이 잃어가고 있는 순수함과 한 길, 한 우물 파기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줬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사랑 싸움으로 일관하는 일본의 드라마와 달리 순정의 중요성을 일깨워 일본의 중장년층으로 하여금 잊혀간 첫사랑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다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친지나 친구 등과 밖에서 술을 먹거나 일찍 잠들었던 30~60대 부부가 아이들을 다 재워놓고 맥주나 와인 한잔 하면서 나란히 겨울연가의 세계에 흠뻑 빠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겨울연가는 한국의 이미지를 확 바꿔놓았다. 기무치(김치).야키니쿠(불고기).아카스리(때 밀기)로 연상되던 한국의 이미지를 불식하고 '아름답고, 지적인, 멋있는 나라'로 격상시킨 것이다.

일 정부의 '겨울연가 현상 대변인'으로 불리기도 하는 문화청 문화부의 데라와키 겐(寺脇硏)부장은 "한국어 배우기 붐이 일고 있는 것을 볼 때 한류(韓流)는 금방 사라질 것 같지 않다"고 내다봤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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