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이태백 ⑨] 해외취업 원하면 전문능력 키워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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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안녕하세요'는 어떻게 읽으면 될까요? 설마 끝부분을 백화점 도우미들처럼 '안녕하십니까~'하고 올려 읽진 않겠죠?"

지난 25일 오전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19층에 위치한 (주)에이앤에스의 작은 강의실. 점잖아 보이는 중년의 여강사가 도우미 여성의 목소리를 흉내내자 진지한 표정으로 듣던 30명의 학생(?)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한국산업인력공단으로부터 위탁받아 지난 3일 시작된'한국어강사 연수과정'수강생들이다.

▶ 한국산업인력공단 측이 올해 처음으로 개설한 '한국어강사 연수과정'이 지난 3일부터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의 (주)ANS 사무실에서 위탁교육 형태로 열리고 있다. 22대 1의 경쟁을 뚫고 참가하게 된 연수생들은 100%에 가까운 출석율을 보이며 진지하게 수업을 듣고 있다.

한국산업인력공단(www.worldjob.or.kr)이 올해 처음으로 실시한 한국어강사 연수 프로그램에는 60명 모집에 1318명이 지원, 거의 22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 4개월 코스로, 교육비는 공단이 전액 지원하는 조건이었다. 지원자들의 학력을 보면 대졸은 기본이요, 석박사 출신들도 적지 않았다. 동남아지역의 한류열풍과 고용허가제의 특수를 타고'한국어강사'가 해외취업의 새로운 인기 직종으로 떠오르고 있음을 실감케 했다.

물론 이 연수 과정이 곧장 취업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다. 아직은 공단과 헤드헌팅 프렌차이즈 업체인 (주)에이엔에스 측이 현지 조사 등을 통해 취업망을 구축하고 있는 단계다. 다만 오는 7월 도입되는 고용허가제의 일환으로 일부 국가(베트남.필리핀.카자흐스탄 등 8개국)의 근로자가 국내에 취업하기를 원할 경우 내년 8월부터 한국어시험을 반드시 거쳐야 하기 때문에 한국어 강사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공단 해외취업지원부의 권영선 차장은 "현재 1년 평균 10만여명의 해외 근로자가 한국을 오가고 있는데, 한국어시험 통과가 필수조건이 되면 약 100만명 가량이 한국어를 배우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에이엔에스의 정의탁 대표는 "필리핀과 베트남 등의 취업 전망은 밝은 편"이라면서 "현지 대학.직업학교들은 물론, 현지에 진출해있는 국내 기업들을 중심으로 계약 조건을 협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해도 한국어강사는 일반적인 해외취업자들이 원하는 것처럼 급여 수준이 높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수요가 경제적 후진국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강사직이 관심을 끄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연수생 김태희(26.여)씨는 한성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항공사 승무원 입사 시험을 여러 차례 본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는"면접에서 번번히 실패한 뒤 거의 취업을 포기했다가 친지 방문차 미국에 6개월 가량 가 있는 동안 내가 '우물안 개구리'란 생각이 들었다"면서 "현지 한인교회를 다니는 한인 2.3세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걸 보고 한국어 강사직을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정정혜(25.여)씨의 목표는 약간 달랐다. 지난 2002년 8월 부산대 정외과를 졸업한 정씨의 경우 학원강사(사회과목)를 거쳐 서울의 한 중소기업에서도 인턴직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하지만 성적이 비슷했거나 오히려 못했던 남자 동기들도 거의 취직한 반면,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반 기업에 취업하기가 더 힘들었던 것 같다"면서 "해외에서 기회를 찾고 있는데 일단 한국어강사 교육과정을 수료해두면 여러 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아 지원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동남아의 경우 급여가 월 1천달러 수준 밖엔 안될 것 같지만, 대신 생활비가 적게 들고 더 많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에이앤에스의 정 대표는 "현재 연수생 3분의 1이 남성인데, 전공과는 무관하다보니 사법고시나 회계사 시험 등을 준비하던 이들도 있다"면서 "이들의 경우 한국어 강사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기 보다는 현지에 가서 사업기회를 찾는데 좋은 밑거름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현재 연수 과정 및 해외에서의 한국어강사 관련 정보는 별도의 사이트(koreanteacher.net)을 개설해 알리고 있다.

이런 한국어 강사직 뿐 아니라 청년실업문제가 심각해지면서 비교적 '몸이 가벼운' 20대 및 30대 초반의 해외구직인원이 급격히 늘고 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의 경우 1998년부터 임시조직으로 운영해온 '해외취업팀'을 올 1월 '해외취업지원부'라는 정식조직으로 확대.승격시키고 사업을 추진하고 있을 정도다. 2002년말만 해도 해외구직인원이 7천여명 정도였으나 2003년 말엔 1만4000여명으로 2배로 늘었고, 올해는 4월말 현재 벌써 1만5000명에 이른다. 이중 60% 이상이 30대 미만의 구직자다.

공단 측은 특히 청년실업문제와 관련, 2000여명에 대해 해외취업을 위한 연수 및 인턴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대부분의 해외취업 연수는 3~10개월 과정으로 1인당 최대 4백만원까지 지원해준다. 해외인턴사업은 해외기업에 인턴사원으로 근무하면서 실무경험을 배양할 수 있도록 항공료.체재비 등을 지원해주고 있다. 미국.캐나다.호주 등의 인턴사원에 2300여명이 지원, 근무업체가 선정된 호주 인턴사원 60여명이 4월말 1차로 출국했다.

최근 해외에서 가장 많은 인력을 요구하는 직종은 복지.의료분야다. 특히 이들 직종은 선진국 중심으로 수요가 많다. 그러나 미국에 간호사로 취업하려면 국내 임상경력이 2년 이상 돼야 하고 미국 간호사 면허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등 조건이 까다로운 편이다.

그 다음이 IT 및 자동차 관련 분야다. 이 직종도 일본 등 선진국에서의 취업이 가능하지만 역시 조건이 만만치 않다.

요즘 국내 청년 구직자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해외 취업 직종은 항공승무원이다. 학연.지연 등으로 국내 항공사에 취직하지 못한 이들이 많이 지원하는 편이라고 한다. 중동 이슬람교 국가들의 경우 자국 여성은 승무원으로 채용하지 않기 때문에 해외에서 거의 충당한다. 공단 측에서 모집 대행 및 1차 선발을 맡고 있는데, 한번 공고가 붙을 때마다 3천명 이상씩 지원한다고 한다. 지난 4월 말부터 실시한 아랍에미리트항공 승무원 채용에는 4600여명이 지원했다. 이 중동지역 항공사들은 전세계를 대상으로 승무원을 선발하는 대신 특정 국가에서 몇 명을 뽑는다는 원칙은 없다. 참고로 지난해 아랍에미리트 항공의 경우 8백명의 신입사원을 뽑았는데, 한국에서는 60명이 선발됐다. 현재 공단 측은 항공사가 직접 선발하러 오는 기회를 1년에 1차례에서 2차례로 늘리려고 노력 중이다.

또 최근에 수요가 늘고 있는 분야로는 또 한-중 비즈니스 등이 있다.

공단의 권 차장은 "그러나 국내에서 취업하지 못했다고 해외로 눈을 돌리는 단순한 생각은 금물"이라면서 "해외 고용주들일수록 일을 '가르쳐서'시킬 생각보다는 현장에 즉각 투입할 수 있는 전문인력을 원한다"고 말했다. 공단에 등록한 대부분의 해외취업구직자는 전체 경력은 오래됐지만 여러 분야에 종사, 고용주가 요구하는 해당분야 근무경력을 채우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직무 수행과 관련된 어학능력은 기본이다. 권 차장은 또 해외취업을 진행하는 데는 장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우선 해외 구인.알선 업체에 지원을 하고, 면접.근로계약체결.출국까지의 시간이 최소 3개월에서 2년까지도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각종 사기를 조심하는 것도 필수다.

보다 자세한 해외취업정보는 공단 및 무역협회(www.kita.or.kr) 등을 참고해보는 것이 좋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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