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지펀드의 줄도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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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호 30면

헤지펀드는 모든 악의 근원인가, 금융위기의 희생양인가? 투자자가 맡긴 원금을 한 푼도 축내지 않고 절대수익(absolute returns)을 보장한다고 뽐내던 국제금융계의 총아 헤지펀드가 줄도산에 직면해 있다.

글로벌 헤지펀드는 지난해 말 기준 1만1000여 개이며 맡아서 굴리는 총자산은 2조2000억 달러로 추산됐다. 이랬던 헤지펀지의 총자산이 현재 1조5000억 달러로 줄었다.

헤지펀드는 보통 분기 단위로 환매 신청이 가능해 내년 1월께면 총자산이 1조 달러로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다. 반 토막 나는 자산 중 일부는 투자자들이 거둬간 돈이고 나머지는 모두 손실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앞으로 연말부터 내년 3월까지 헤지펀드 2000개, 잘나가는 헤지펀드에 투자하는 ‘헤지펀드 투자 펀드(fund of hedge funds)’ 500개 등 2500개가 청산돼 문을 닫을 것이란 예측이 나오고 있다.

헤지펀드 업계의 ‘대부’ 조지 소로스는 투자와 투기는 현실적으로 분간이 어려우며 ‘성공한 투기가 곧 투자’라고 규정했다. ‘성공적인 투기자들’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물론 글로벌 금융위기의 난리판에서도 30% 넘는 수익을 올린 헤지펀드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헤지펀드를 통해 가장 성공적으로 돈을 굴리던 하버드대마저 7월 이후 넉 달 사이에 370억 달러 기부자산 가운데 80억 달러를 날렸다. 아무리 헤엄을 잘 쳐도 금융 쓰나미 앞에서는 도리가 없다는 얘기다.

우선 투자자산 가격이 지난 2, 3개월 사이 급락했다. 불안을 느낀 부자 고객들이 앞다퉈 환매를 요청하고 금융기관들은 대출금 회수에 들어갔다. 고객이 더 이상 돈을 맡기지 않고 금융기관이 더 이상 돈을 빌려주지 않으면 헤지펀드가 설 땅은 없다.
헤지펀드들은 이제 비명 소리 한번 못 내고 ‘의연한’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금융위기 때마다 위기의 주범으로 따가운 눈총을 받아 온 ‘지은 죄’ 때문인가. 10년 전 아시아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몰린 이들이 올 들어 국제 원유가 폭등, 심지어 금융위기의 촉발과 무관치 않다는 시각도 없지는 않다. 투자은행 베어스턴스의 몰락 때 월가의 헤지펀드 수장들이 조찬 모임에서 쾌재를 부르면서 또 다른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죽이기에 가담했다는 음모론도 나돌았다.

그러나 헤지펀드 업계는 이 모두가 ‘금융위기 속죄양 만들기’ 시리즈의 최신판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 1929년 대공황 때 은행가들을 속죄양으로 삼은 것과 같다는 얘기다. 이후에도 87년 주식시장 붕괴 때는 내부자 거래에, 90년대 초 경기 침체는 작은 자본으로 큰 기업을 매수하는 ‘레버리지 바이아웃’ 도당들에게, 그리고 2000년 정보기술(IT) 거품 붕괴는 증권 애널리스트들에게 각각 책임을 돌렸다는 것이다.

10년 전 외환위기는 기업의 과다 차입과 무분별한 투자가 원인인 반면, 지금의 금융위기는 금융회사의 과도한 레버리지 사용과 도덕적 해이에 규제기관의 감독 소홀이 겹친 게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실제 원유 상품 투기의 경우 헤지펀드들은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후일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대안 투자’로서 헤지펀드가 갖는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높은 레버리지에 튀는 거래 스타일, 공격적이고 투기적인 투자 전략은 시장에서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줄도산을 슬퍼하거나 걱정하는 여론은 찾아볼 수 없고, 당국의 구제금융 지원도 만무할 것이지만 그들 스스로 바라지도 않는다. 헤지펀드 총자산의 67%를 점하는 미국에서 유동자산을 최소한 500만 달러 이상 가진 개인이나 2500만 달러 이상 가진 기관이라야 헤지펀드에 돈을 맡길 수 있다. 저마다 위험 부담을 감내하면서 투자할 용의를 가진 사람들이다.

헤지펀드 산업은 90년 이후 2002년 한 해(마이너스 1.5%)만 빼고 연평균 11.4%의 수익률을 기록해 왔다. 글로벌 평균수익률이 마이너스 20%를 밑도는 상황에서 시장원리에 따른 조용한 퇴출은 ‘존엄사’에 비유되기도 한다. 헤지펀드 업계는 이미 상위 3% 회사가 총자산의 80%를 점할 정도로 대형화로 치닫고 있다. 소로스의 퀀텀펀드, 타이거펀드 등 90년대 스타 펀드들은 이제 톱10에 끼지도 못한다. 헤지펀드의 줄도산은 최상급 펀드와 특화된 펀드만이 살아남는 산업 재편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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