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농구, 하프 코리안을 수혈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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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호 16면

하프 코리안 드래프트 논쟁을 불러온 토니 애킨스는 미국 대학농구를 휘저은 스타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스포츠 팬들은 한 달여 동안 행복했다. 그런데 베이징 올림픽에서 선전한 수많은 종목 중에 남자농구는 없었다. 올림픽 본선행 티켓을 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지난해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중국을 제외한 한 팀이 가져갈 수 있었던 올림픽 본선 직행 티켓을 따내지 못했다. 올해 7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올림픽 최종예선에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참가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점점 뒤떨어져만 가는 한국 남자농구의 국제경쟁력을 씁쓸하게 다시 확인했을 뿐이다.

10년째 메이저 무대서 태극마크 실종

2006년 열린 도하 아시안게임의 기억은 최악이었다. 남자배구가 금메달을 품에 안고 선수단 기수로 태극기를 들고 금의환향한 반면 남자농구는 ‘노 메달’로 고개를 숙였다. 남자농구가 아시안게임에서 노 메달 수모를 당한 건 무려 48년 만이었다. 당시 언론은 ‘겨울 스포츠 라이벌’ 농구와 배구의 아시안게임 성적을 연일 비교했다. 이것이 농구 흥행에 결코 좋은 영향을 끼쳤을 리 없다. 한국 남자농구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과 98년 세계선수권대회 이후에는 메이저 국제대회의 본선 무대조차 밟지 못하고 있다.
 
희망으로 떠오른 하프 코리안
한국농구연맹(KBL)은 2012년 런던 올림픽 본선에 반드시 참가한다는 목표로 ‘런던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핵심은 하프 코리안(혼혈 한국인)에게 문호를 개방하기로 한 것이다. 한국 농구의 유전자를 바꿔 국제경쟁력을 높이고 프로리그의 인기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전육 KBL 총재는 16일 “한국으로 귀화할 뜻이 있는 하프 코리안들이 한국 프로농구 무대로 많이 와 국제경쟁력을 높일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2010년 세계선수권과 2012년 런던 올림픽 본선에 나가려면 준비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가능한 한 빨리 서둘러야 한다”라고 말했다.

하프 코리안에 대한 논의에 불이 붙은 것은 7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 때부터다. 여기에 참가한 혼혈 선수가 “한국 프로농구에서 뛸 수만 있다면 귀화해 한국 출신 어머니와 함께 꼭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이전에도 드래프트에 참가한 혼혈 선수가 더러 있긴 했지만 애킨스는 또 달랐다. 그가 한국 선수로서 뛸 경우 리그 최고로 꼽히는 김승현(오리온스)을 능가하는 포인트가드가 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평가가 줄을 이었다. 국가대표팀 관계자들은 애킨스가 귀화할 경우 당장 대표선수로 뽑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프로농구 10개 팀은 그에게 모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작 라스베이거스 드래프트 현장에서 애킨스는 외국인 선수로서 뽑히지 않았다. 10개 구단은 “아직 검증이 안 됐고, 외국인 선수 신장 제한이 없어진 마당에 키 큰 선수들 사이에서 1m80㎝에 불과한 애킨스가 외국인 선수로서 경쟁력이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애킨스는 크게 낙담했지만 그 후 석 달여 만에 KBL 이사회에서는 하프 코리안 드래프트를 따로 열자는 논의가 급속도로 진행됐다. 이제 KBL이 하프 코리안 드래프트에 관한 구체적 방식만 확정할 경우 다음 시즌 한국 선수로 뛰는 애킨스를 보는 건 시간문제다.
 
김동광·김성욱·김민수 선례 있어
한국 농구 역사를 보면 화제를 모았던 혼혈 선수가 있었다. 현재 KBL 경기이사로 있는 김동광 전 KT&G 감독은 대표적 혼혈 선수 출신이다. 그는 현재 하프 코리안 드래프트와 관련, 참가자 신청을 받고 총괄하는 업무도 함께 하고 있다.

김동광 부자

‘1세대 혼혈 선수’를 대표하는 김 감독은 혼혈 출신이라는 설움을 딛고 성공한 인물이다. 미 공군 출신의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김 감독은 파워 넘치는 드리블로 코트를 휘젓는다고 해서 선수 시절 ‘탱크’라는 별명이 있었다. 그는 “남들이 나를 보면 혼혈로서 남다른 운동신경을 타고나 어린 시절부터 농구 엘리트 코스를 밟은 줄 안다. 하지만 대학(고려대)도 잘하는 동료에게 ‘묻어서’ 겨우 들어갔을 정도로 주목받지 못했다. 혼자 뼈를 깎는 노력을 한 끝에 뒤늦게 성공했다”고 말했다. 그는 은퇴 후 지도자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86년부터 91년까지 실업농구 현대전자에서 뛴 혼혈 센터 김성욱도 인기가 높았다. 97년 프로농구가 막을 올린 이후에는 또 다른 혼혈 선수 권종오(전 KCC)가 덩크슛을 잘 하는 식스맨으로 이름을 알렸다가 은퇴했다.

‘2세대 혼혈 선수’는 2000년 이후 대학 농구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탄생했다. 경희대 출신의 김민수(SK)는 한국인 어머니를 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을 찾았다. 귀화 작업을 마친 후 대학 무대에서 활동하다가 올해 프로 새내기로 활약 중이다. 연세대는 한국인 어머니를 둔 미국 출신 이동준(오리온스)을 영입했다. 이동준은 지난해 프로 무대에 첫선을 보였고, 아직 한국 농구 적응에는 숙제가 있지만 발전 가능성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이동준보다 기량이 한 수 위라는 평을 듣고 있는 친형 에릭 산드린은 2007~2008시즌 모비스에서 외국인 선수로서 뛴 적이 있고, 앞으로는 한국 선수로서 한국 프로농구에서 뛰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 밖에 98~99시즌 외국인 선수로 뛰었던 토니 러틀랜드(전 SK) 역시 혼혈이었다. 가드였던 러틀랜드는 아쉽게도 한국 농구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출됐다.

‘어떻게 뽑느냐’가 문제
하프 코리안이 한국 농구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한국에서 뛰고 싶어하는 하프 코리안들을 프로농구 10개 팀이 어떻게 뽑을 것이냐다.

김동광 이사는 16일 “하프 코리안 드래프트에 이미 신청했거나, 신청을 약속한 선수는 5~6명 선”이라고 말했다. 이 중 애킨스와 유럽리그 경력이 있는 제로드·그레그 스티븐슨 형제 등을 제외하면 즉시 전력감을 찾기 어렵다. ‘런던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시작한 하프 코리안 드래프트가 사실상 ‘애킨스 선발 이벤트’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과거 하프 코리안이 아닌 교포 선수들의 경우 국내 신인 드래프트에서 대학 선수들과 함께 선발됐다. 2005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모비스가 캐나다 교포 김효범을, SK가 재미교포 한상웅을 1라운드에서 선택하자 “대학 농구를 죽이는 일”이라며 대학 팀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력 때문에 하프 코리안 드래프트를 신인 드래프트와 따로 열어 대학 팀의 반발을 줄이겠다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10개 팀 모두 애킨스를 뽑고 싶어하기 때문에 하프 코리안 드래프트 방식에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신인 드래프트에 하프 코리안을 포함할 경우 지난 시즌 하위 4개 팀만 우선 선택권을 갖는다. 이런 방식이 될 경우 나머지 6개 팀의 반발이 크다. 하지만 하프 코리안 드래프트를 따로 열 경우 우선 선택권을 어느 팀이 가져가느냐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최근 하프 코리안 드래프트와 관련한 안건을 상정한 이사회에서는 “최소한 팀당 한 명씩은 당장 쓸 수 있는 하프 코리안 선수를 뽑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발도 나왔다. 현재로서는 당장 뛸 선수가 두세 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KBL 관계자는 “귀화해 한국에서 뛰고 싶어하는 수준급 하프 코리안이 매년 나오지는 않는다. 올해 드래프트를 한다고 해도 향후 운영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도 고민”이라고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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