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중년>1. 부모에서 부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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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중년.숨가쁘게 지나온 청춘을 매듭짓고 서서히 노년이란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다.하지만 집 안팎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변화들에 당황해 하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 중년남녀의 현실.한편으론 경제적 안정을 토대로 제2의 도약을 꿈꾸기도 한다.중년의 빛과 그림자를 시리즈로 담아낸다. [편집자]

결혼 25년째를 맞는 박혜숙(51.서울서초구반포동)씨는 요즘'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평생'하숙생'으로만 여겨온 남편이 변해도 너무

변한 것이다.귀가 시간이 빨라진 것은 물론 주말이면“뭐 도와줄 일

없어”라며 부엌 근

처를 맴돈다.급기야“나이들어 생각하니 역시 당신밖에 없더라”는

낯뜨거운(?)고백마저 듣고보니'밖으로만 돌땐 언제고…'하는

얄미움에다'이 사람이 정년을 앞두더니 약해지나보다'는 안쓰러운

생각까지 만감이 교차한다고 했다.

흐르는 세월을 통해 부부간의 정도 돈독해지는게 순리겠지만 실상은 결혼

10년을 넘어가면서부터 그저 무덤덤해지고 만다는게 일반론.그러나 자녀

수가 줄고,그 아이들마저 학원이다,과외다 해서 얼굴보기 힘들어진

요즈음의 중년에겐 새삼 부부관계의 중요성이 실감나게 다가온다는 얘기들을 한다.20~30대땐 생활기반 잡느라,아이들 치다꺼리하느라 부부가 오붓한 시간을 가질수 없었지만 40~50대 중년에겐'제2의 신혼'을 꿈꿔볼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실제로 본지 여론조사팀의 부부관계조사(95년)에 따르면 부부의 하루

대화시간이 117.95분(20대),114.70분(30대)에서 50대엔 138.47분으로 크게

늘어났다.

특히 박씨 부부처럼 남편이 정년을 앞두거나 조기퇴직.명예퇴직이

가시화될 무렵이면 그동안 바깥일에 쏠렸던 무게중심이

가정으로,부부관계로 급격히 옮아오게된다.부부가 함께 하는 절대 시간이

늘어나는 것도 그 이유지만 사회의'쓴 맛'을

겪을대로 겪은 남편들이 가정생활에서 새로운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얼마전 난생 처음 남편이 챙겨준 결혼기념일 선물을 받아들고 감동에

젖어있다는 주부 김경옥(43.경기도고양시)씨.“젊을 땐 피차 바빠

기념일이나 생일을 기억하는 잔재미는 잊고 살았다”는 그는“서로에 대해

좋은 감정이 회복되면서 오히

려 성생활도 만족스러워졌다”며 쑥스러워했다.

40대 후반에 접어든 김경식.정희수(경기도과천시)씨 부부는 몇해째 매일

아침 함께 산에 오르는 경우.건강도 건강이지만 은퇴후에 대비,미리미리

부부가 같이할 수 있는 소일거리를 만들어놔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이처럼 함께 하는 취미를 키우려는 중년부부들이 늘어나며 그동안

젊은층의 전유공간처럼 여겨지던 문화시설.컴퓨터통신등에 중년층이

몰리는 것도 최근의 새로운 추세.대학로 주변의 연극.콘서트엔 나이

지긋한 부부 관객들이 심심찮게 찾아들고

하이텔의 부부사랑동호회엔 40대이상의 부부들만 동반 가입할 수 있는

'팔사모'라는 소모임이 2년째 맹렬히 활동중이다.첫해 19쌍이었던

회원수가 현재는 65쌍.이밖에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열리는

볼룸댄스.노래부르기 강좌등에도'용감한'중년학생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중년부부들이 갑작스레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다보면 더 큰

갈등을 겪게될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최근들어 중년층의 이혼이 급증한

것(86년 전체의 4.5%→95년 9.1%)도 그때문.한국가정법률상담소 곽배희

부소장은“가정으로

돌아온 남편들이 변화된 환경에도 불구하고 권위적인 태도를 고집할때

아내들이 예전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게 불화의 주요인”이라며“중년은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어줘야 할 시기라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충고한다.

사회학자 박숙자(국회여성특위 정책연구위원)씨는“지금과 같은 과도기를

거친 후 부부가 중심에 놓이는 가족관계가 확실히 자리잡게 되면 현재

우리나라 가정에 만연한 자녀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도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신예리 기자〉

<사진설명>

현대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볼룸댄스를 배우고 있는 부부 수강생들.'제2의

부부시대'를 맞은 중년들이 강사의 지도에 따라 열심히 몸놀림을 배우고

있다. 〈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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