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아가벌>14. 리카싱家 - 중국인 사회의 살아있는 財神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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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중국과 대만.홍콩의 소위'양안삼지(兩岸三地)'라고 일컫는 중국인 사회에서 리카싱(李嘉誠)은 부(富)의 화신이자 살아 있는 재신(財神)이다.동남아의 경제권을 주름잡고 있는 남양(南洋)화교들의 사회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14세에 중학을 중퇴한 뒤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세계 최고의 중국인 부자가 될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상재(商才)와 처신술 덕분이다.

李는 홍콩반환을 앞둔 지금 베이징(北京) 고위층과의 친교를 바탕으로 정치적으로도 성가를 드높이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이에 따라 그는 지난해 11월 초대 홍콩특별행정구 장관으로 선출된 둥젠화(董建華)와 함께 홍콩및 해외

중국인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6년 연속 세계 최고의 화교부호로 이름이 오르기도 했던 그가 요즘들어 부호 순위에서 조금 처지고는 있지만 그가 화교기업가의'상징적 존재'라는 점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28년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 차오저우(潮州)시에서 태어난 그의 첫 직장은 홍콩의 한 찻집(茶館).그는 이곳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빠른'눈치'로 두 가지를 몸에 익혔다.첫째,그는 단골손님들의 고향과 직업.연령등 개인신상을 훤히 꿰

뚫었다.둘째,손님들의 취향과 이에 따르는 소비심리를 정확하게 기억해 뒀다가 주문받을 때 이를 적절히 사용했다.그는 이후 철물점 판촉사원을 거쳐 플라스틱 혁대를 파는 외판원이 됐다.

그의 첫 창업은 22세 되던 50년.홍콩섬에'청콩(長江)플라스틱 공장'을 차리면서부터.50년대말 플라스틱 인조화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60년대를 거치면서 이 회사를 세계 최대 플라스틱 인조화 제조사로 키운 그는 1차 석유파동이

오기전에 부동산으로 업종을 전환한다.

그의 성공을 보고 뒤따랐던 플라스틱 제조업체들은 석유파동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 쓰러져갔지만 그는 재빠른 업종전환으로 살아 남았다.그는 후에도 전력.인프라.위성산업등 변신을 거듭하면서 세계 최고의 중국인 실업가로 탄탄하게 자리잡았

다.

리카싱의 두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 독특한 교육을 받았다.두 아들은 10세도 안된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기업경영 현장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다.

리카싱은 청콩실업의 크고 작은 회의때마다 어린 두 아들을 곁에 두고 회의를 진행했다.체험을 통해 상술을 익히라는 배려에서였다.

큰 아들 리쩌쥐(李澤鉅.영어이름 빅터)와 둘째 아들 리쩌카이(李澤楷.리처드)는 아버지의'조기교육'덕분에 업계의 젊은 맹장(猛將)으로서 왕성한 기업활동을 펼치고 있다.

첫째 리쩌쥐는 캐나다 국적을 획득한 뒤 캐나다 석유회사 합병에 나섰으며 밴쿠버 세계박람회 부지 구매등 부동산업에서 실력을 발휘한 뒤 현재는 청콩실업의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부친의 후계구도를 착실히 다지고 있다.

'스타TV'를 운영하다 세계적인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에게 이를 매각한 뒤 싱가포르에 새 통신사업체를 설립하는등 활발한 사업수완을 보여온 둘째 리쩌카이는 리카싱의 젊은 시절을 빼닮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현재는 부친의 주력사중 하나인

허치슨 왐포아의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리카싱은 단순한 기업인이 아니다.그는 업계의 매각과 합병이라는'살벌한'전장에서도 악연(惡緣)을 맺는 것을 철저하게 회피,동업자들로부터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또 94년 홍콩의 모 주간지가 그의 사생활이 어떤가 궁금해 리카싱의 집 쓰레기를 뒤졌지만'별볼 일'이 없었을 만큼 사생활이 매우 검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홍콩귀환을 위한 과정에서 특별행정구 준비위원회 부주석을 맡는등 그의 역할은 남달랐던 것으로 알려졌다.독특한 친화력을 바탕으로 형성한 중국 권력층과의 도타운'관시(關係)망'과 기업계에서의 명망(名望)으로 리카싱은 단순한 부호가

아닌 13억 중국인 사회의 새 실력자로 다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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