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무리였던 '환란재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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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현 사회부 기자

6년 전인 1998년 5월 말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기자실.

대검 중수부 수사팀과 기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검찰이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직무유기 등 혐의로 구속 기소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다.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문민정부 경제실정 사건'을 수사하겠다고 나섰던 검찰은 "정책적 판단에 대해서도 사법적 심사가 가능하다"는 논리를 폈다.

수사팀의 한 관계자는 "두 사람의 정책 대응 실패가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것이 경제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라며 사법처리 배경을 설명했다.

"경제 정책 담당자가 고의로 경제를 망치려 했다는 검찰의 논리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는 기자들의 질문에 "재판을 통해 형사적 책임뿐 아니라 정책 대응상의 오류도 반드시 밝히겠다"고 장담했다.

'검찰의 역사적 책무' '정당한 검찰권 행사' '국민의 울분'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까지 동원해 두 사람에 대한 사법처리를 정당화 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27일 당시 검찰의 논리는 법률적으로 무리였음이 입증됐다.

"피고인들이 외환위기에 안이하게 대처했고, 직무를 유기했다는 점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최고 법원의 판단이다.

김대중 정부가 외환위기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없애고, 전 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하기 위해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대법원 판결은 "정책 결정자들을 처벌하는 것보다 시스템상 잘못을 가려내 재발을 막는 것이 외환위기에서 얻어야 할 교훈"이라는 점도 보여줬다.

미국은 2001년 9.11사태 때 관계 공무원들의 대처나 판단 오류 여부에 대해 철저하게 경위를 규명했다.

하지만 우리처럼 사법처리라는 극약 처방을 통해 여론을 무마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우리 사회도 특정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충격 요법이나 정치적 처방을 동원하는 후진국형 수습 방법을 버려야 한다.

대신 재발 방지에 필요한 제도적 문제점 등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박재현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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