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票心 방패 삼아 ‘언터처블’ 공룡 조직으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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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호 04면

“1990년대 이전까지 선거 관련 표심(票心)을 가장 정확하게 읽는 정보기관이 어디였는지 아십니까. 바로 농협이었습니다. 중앙정보부보다 농협의 정보보고가 훨씬 정확했다고 해요. 전국에 농협 없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산간벽지에도 농협은 있고, 농협 조합장은 집집마다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 누가 누구 친척이고 친구인지 훤히 알고 있으니까요.”

농협 개혁 번번이 좌초한 까닭은

김영삼 정부 시절 청와대 농림해양수석비서관을 지낸 최양부 전남대 초빙교수는 “당시 청와대에서 정보보고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정부 관계자들이 주고받던 말”이라며 “바로 이것이 농협의 힘”이라고 말했다.

故 박 대통령 신년 업무보고 직접 받기도
협동조합은 사회적 약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한국의 농업협동조합은 정부가 먼저 만들었다. 이런 태생적 한계 때문에 농협의 독립성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자주적인 개인단체라기보다 농정을 펴는 국가의 보조조직으로 커 왔다는 비판은 그래서 나온다. 정부는 1957년 농업협동조합법과 농업은행법을 제정하고 지역 단위조합을 만들고 이듬해 농협중앙회를 만들었다. 농촌 인구가 도시 인구를 웃돌던 60, 70년대 농협의 위세는 대단했다.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농협중앙회로 가 신년 업무보고를 받고 장관 출신을 농협 회장에 앉힐 정도로 농협을 중시한 덕분이다.

정부가 임명하던 중앙회장을 조합장들이 직접 선출하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 열풍이 거셌던 88년부터다. 당시 여당은 야당(YS와 DJ)이 요구하던 지방자치제 도입을 미루는 대신 농협 조합장과 중앙회장 직선제를 도입했다.

민선 초대 한호선 중앙회장은 농민은 아니었지만 농협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고려대 학생회장 출신인 그는 이·동조합 통합과 지역조합 은행의 탄생을 주도한 농협맨이었다.

2대 민선 회장인 원철희 회장은 한국 농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농산물을 잘 팔아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나로클럽을 설립하고 직거래 장터를 만드는 등 유통사업에 주력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 집권 1년 만에 그는 비리혐의로 물러났고 공기업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당시 정부는 난립해 있는 협동조합 조직을 축소하기 위해 농·축·인삼협동조합을 통합하고 중앙회 산하에 둠으로써 중앙회는 거대 공룡조직이 됐다.
2000년 회장이 된 정대근 회장은 최초의 조합장 출신이다. 원래 서울 용산시장(현 가락동 시장)에서 청과물 장사를 하던 그는 삼랑진 조합장, 중앙회 비상임이사와 상임감사 등을 거쳐 중앙회장에 당선됐다. 호탕한 성격에 보스 기질이 다분한 그는 중앙회장에 출마하면서 조합당 20억~40억원의 무이자 자금을 빌려주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실제로 그는 집권 8년간 각 지역조합에 다양한 명목으로 무이자 자금을 지원했다. 또 농협을 농민이 아니라 임직원 중심의 관료조직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듣는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그의 권한은 훨씬 커졌다. 대통령의 형·사돈·후원자의 후광이 그의 큰 힘이었다. 원래 회장과 동등한 위치였던 감사 조직을 회장 직속으로 끌어내렸으며, 신용·경제·교육 등 각 부문 대표이사의 추천권 및 자회사 대표 임명권을 쥐고 흔들었다. 한국의 농정은 농림부가 있는 과천이 아니라 농협이 있는 서대문에서 좌지우지한다는 얘기까지 떠돌았다. 서울지역 한 조합장은 “휴켐스 같은 알짜 자회사를 헐값에 노 대통령 후원자 박연차씨에게 넘긴 것도 그의 결정이었다. 휴켐스는 매각 작업이 다 끝난 뒤에야 이사회에 보고하고 일사천리로 승인받았다”고 전했다. 정 회장 당시 농협은 농민을 위한 협동조합이라는 농협의 근본적 존재이유는 오간 데 없이 금융 부문을 강화하고 돈벌이에만 치중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지역조합을 통폐합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농업계 요구는 무시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지역조합은 무이자 자금을 지원해 연명케 했다.

정치권과 묘한 공생관계도
한 농협 관련 단체 관계자는 “농협중앙회장은 정권과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멀어도 안 된다. 너무 가까우면 비리가 터지고 너무 멀면 밉보여 찍힌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농업개방 등 현안이 불거지거나 정권이 바뀔 때, 성난 농심을 다스릴 필요가 있을 때 농협회장은 정치적 희생양이 된다”고 평가한다. 원 전 회장은 “회장은 불행한 자리”라며 “정치권 비위를 맞출 수도, 안 맞출 수도 없다”고 했다.

이는 농협이 농림부가 관할하는 농협법 아래 있는 산하기관이면서 동시에 농림부 및 정치권을 맘대로 주무를 힘이 있는 조직이라는 복잡한 역학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농업정책 자금이 농협을 통해 집행되지만 정부가 급할 때면 자금을 꺼내 쓸 수 있는 금고 역할도 해 왔다. 한편 정부가 농협 개혁을 명분으로 조직을 축소하려 할 때 농협은 자신의 힘인 풀뿌리 조직을 이용해 정치권에 거센 로비를 펼친다.

중앙회장의 강력한 권한은 조직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여기엔 농민의 은행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국내 굴지의 금융그룹으로 성장한 농협의 자금력이 바탕이 된다. 2017년으로 미뤄진 신용 부문과 경제사업 부문의 분리 일정을 앞당겨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달 농림부가 내놓은 중앙회장의 부문 대표이사 추천권 제한 및 감사권 강화 등의 개혁법안이 국회 공청회를 거치면서 주요 내용은 쏙 빠진 채 통과됐다. 하지만 지난 4일 이명박 대통령이 농협을 강력하게 질타한 뒤 농림부는 산하에 농협개혁위원회를 만들어 내년 2월까지 개혁법안을 만들겠다는 방침을 내놓고 있다.

해묵은 과제인 농협 개혁을 들고 나온 이명박 정부에 대한 농업계의 시선은 아직 차갑다. 과연 해결 의지가 얼마나 있느냐는 것이다. 이헌목 한농연 농업정책연구소장은 “농민은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농민 지원 조직인 농협은 점점 비대해지고 있다. 이것이 핵심이다. 농협은 자신의 존재이유가 무엇인지 모든 것을 원점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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