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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식탁] 紅白의 소박한 어울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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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식혜의 참맛을 보기 위해 안동을 찾았다.

"아지매!" 마당 안으로 들어서면서 대번 우리를 이곳으로 안내한 동행의 말씨부터가 바뀌었다.

잠시 뒤 대문 뒤로 그의 손을 맞잡은 백발의 할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설픈 데 찾아오니라 고생했니더." 광산 김씨 유일재(惟一齋)의 종부 김후웅 할머니다.

유일재는 서른여덟 칸짜리 기와집이다. 특이한 건축 양식과 오래된 연대 때문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미음자 한옥을 중심으로 그 양쪽에 사당과 디딜방아가 놓인 방앗간이 자리잡고 있다. 기제사 열세번에 불천위 세위, 명절 차사 두번. 유일재는 일년에 제사를 열여덟번 지낸다. 열여섯의 식구 외에도 사랑에 묵는 손님들이 늘 예닐곱은 되었다. 시어른의 간식거리도 끊이지 않아야 했다. 할머니가 안동식혜를 만들기 위해 지은 지에밥만 해도 쌀 몇가마는 좋이 될 것이다. 허리 한번 제대로 펼 짬이 없던 날들이었다.

▶ 김후웅 할머니의 넉넉한 웃음뒤로 늦봄 햇살이 따사롭다.

처마들 위로 들어오는 하늘도 미음자 모양이다. 집 안팎 곳곳에 할머니의 손때가 묻은 리어카와 칼.호미 등이 툭툭 채인다. 대청마루는 마당에서 1m 남짓 높이에 놓였다. 마루에 걸터앉으니 사랑채와 장독대가 고스란히 한눈에 들어온다. 그동안 키 맞추느라 안달복달하던 것들이 발 아래로 멀찍이 물러나는 기분이다.

식혜(食醯)는 겨울 음식이다. 항아리 가득 식혜를 담가놓으면 겨울 바람에 살얼음이 잡힌다. 얼음으로 바가지로 깨고 식혜를 떠마시면 밥알과 함께 잔얼음이 목구멍을 넘어가는데 선득선득 짜릿하다. 하지만 냉장고가 보급된 뒤로 식혜도 제철이라는 것이 없어졌다.

엿기름 가루를 우려낸 물로 만드는 안동의 음청류(술 이외의 기호성 음료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는 감주와 점주.안동식혜가 있다. 감주는 점주와 안동식혜와는 다르게 엿기름 물을 달여 쉽게 쉬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찹쌀로 지에밥을 만드는 점주는 상객(上客)이나 요객(繞客)에게 내는 귀한 음식이었다. 붉은 음식을 올릴 수 없는 제사상에 올릴 때에도 점주를 쓴다. 시계가 없던 시절, 초저녁에 만든 점주에 쌀알이 뜨기 시작하면 제사를 지내는 시간이 맞춤하게 되었다. 찹쌀 알맹이가 탱글탱글 살아있고 끈적끈적한 느낌을 주는 진한 맛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안동의 음청류로는 단연 안동식혜가 손꼽힌다. 찹쌀이나 멥쌀을 물에 불려 지에밥을 짓는 것으로 준비가 시작된다. 시루에 찌되 고두밥이 되게 한다. 엿기름을 물에 치대어 가라앉히면 말간 웃물이 뜨는데 그 물을 쓴다.

할머니는 좀처럼 앉아있으려 하지 않는다. 안동식혜를 내오고 국수를 삶기 위해 부산스레 움직인다. 하지만 급한 마음을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때마다 장단처럼 내뱉는다. "아이고, 팔십밖에 안 살았는데 와 이리 힘이 드노." 전날 밤에는 새벽 두시쯤 저절로 눈이 떠져서 서울 손님들에게 대접할 칼국수를 밀려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결이 고른 국수발에서 할머니의 매운 손끝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기계로 뽑아낸 듯 가지런하다. 콩가루를 넣고 반죽한 국수는 삶아 건져 찬물에 헹구는데, 건졌다 해서 '건진 국수'라고 부른다. 안동식혜와 더불어 안동의 또다른 별미 중 하나다.

무는 채썰거나 골패썰기로 준비해 둔다. 엿기름물에 베에 싼 고춧가루를 담가 붉게 색을 들인다. 항아리에 무를 넣고 지에밥을 얹은 다음 엿기름물을 섞고 생강즙을 짜넣는다. 여섯시간 정도 따뜻한 곳에서 삭히면 밥알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렇게 밥알이 삭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시간이 지나갔지만 남편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할머니는 지난해 2월 금강산에서 6.25 때 월북한 남편과 상봉했다. 54년 만이었다. "나는 몬 알아보겠는데 그쪽에서 알아보데." 물처럼 흘러간 시간 속에 신랑과 각시의 얼굴도 딴판으로 변해 있었다. 시집 와 남편과 보낸 다정한 시간이란 다 합해봐야 고작 한달도 되지 않을 거라고 할머니가 웃는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아이는 홍역으로 잃었다. 힘에 부치던 일 때문에 칭얼거리는 아이를 제대로 안아주지도 못했다. 많던 식구들 장성해 떠나고 이제 유일재 너른 집에는 할머니 혼자 남았다.

식혜는 너무 많이 삭히면 신맛이 강해진다. 차가운 곳에 보관한 후 먹을 때 단맛을 더하고 잣이나 땅콩을 띄운다. 안동식혜를 가자미식해처럼 찬거리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할머니는 시집와서야 처음으로 안동식혜를 만들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어릴 적에는 안동식혜를 먹은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동식혜의 전통이란 50년 안팎에 불과한 것일까.

야채와 밥.생선을 버무린 식해는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버린 음식물이 뒤섞여 발효되는 것을 우연히 먹으며 시작됐을 거라고 영남대 인류학과 박현수 교수는 말한다. 고기식해에서 생선류가 빠지면서 야채식해가 되고, 양념과 소금간이 빠지고 단맛이 섞이면서 오늘날의 음청류가 된 듯하다.

언제 또 북의 할아버지와 만날 수 있을는지는 기약이 없다. "통일돼야 만나겄지." 매운맛과 단맛의 조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안동식혜 맛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한번만 맛을 보았다면 어느날 불현듯 그 맛이 생각날 것이다. 할머니는 얼음이 살짝 끼게 안동식혜를 얼려두었다. 혀끝에서 단맛이 느껴지고 입안이 매콤해진다. 아삭아삭 씹히는 무를 삼키고 나고 혀에는 삭은 찹쌀이 코끝에는 생강향이 남는다.

사진 촬영을 위해 웃으세요, 하자 "그럼 길안 장의 조짚 바소구리처럼 우스까" 한다. 바소구리란 지게에 얹는 발채를 말하는데 그 끝이 휜 것처럼 할머니가 활짝 웃는다. 반질반질했을 장독대 위해 바람이 실어나른 흙먼지가 내려앉았다. 평생 쉴 틈 없이 움직였던 몸이 이제는 조금 굼뜨다. 사진 촬영이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칼국수 물을 끓이고 반찬들을 내온다. 장독대 앞에 심은 파가 꽃을 피웠다. 파꽃이 핀 걸 보니 벌써 여름이 왔다. 파꽃 세 송이. 마당에 심은 유일한 꽃이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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