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정치가 경제를 망치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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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나는 평소 정치가 잘못돼도 경제는 별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 낙관했다.군사독재 아래서도 경제는 번영했으니 문민정부가 들어섰으면 경제는 정말 제대로 잘 굴러갈줄 알았다.현정부 처음 2년간은 이런 낙관론이 들어맞는듯 했다.그러나 이게

얼마나 무식하고 허무한 낙관주의였나를 이번 노동법 개정 과정을 지켜보면서 통감하고 있다.정치를 잘못하면 경제는 개판이 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현 정부가 노동법을 개정하자고 했을 때 내세운 방향과 원칙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으니 그 기준에 맞는 노동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 내리막길에 들어선 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노동시장의 탄력성.유연성을 가져야 한다는 필

요성 때문이었다.원칙도 좋았고 방향도 옳았다고 본다.

노동악법이라 할 3禁(복수노조 금지.3자개입 금지.정치활동 금지)을 풀고 국제기준인 3制(정리해고제.변형근로제.대체근로제)를 도입해 경제도 살리고 노조활동의 민주화도 기하자고 했다.

그러나 지금 그때의 정신과 취지는 어디로 갔는가.불과 석달전 일이다.새벽 국회의 날치기 법안통과와 한보파동을 겪으면서 원래 정신은 자취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힘겨루기와 눈치보기로 노동법은 누굴 위해 무엇을 하려고 개정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끔 흘러가고 있다.법개정의 원칙이었다 할 국제적 기준.관행과 경제살리기는 뒷전이 돼버리고 노조와 야당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날치기 통과로 염치없게 된 여당과 한보사태를 지나며 무력해진 정부 때문에 방향도 잃고 원칙도 없이 목

소리 큰 세력에 끌려 그냥 흘러가고 있다.

유예하기로 했던 복수노조는 논의 한번 없이 당장 허용으로 돌아섰고 정리해고제는 거꾸로 유예쪽으로 가고 있다.이미 지난 10년간 난장판 노사분규를 통해 무언의 합의로 도출된 무노동 무임금 원칙마저 법제화 반대 쪽으로 대세는 기울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유례 없는 노조전임자의 임금지급도 노조활동 위축이라는 이유로 그 금지를 미루고 있다.

따지고 보면 여당의 날치기 통과라는 비민주적 처사가 불러온 파국이고 정권의 부도덕성이 몰고온 자업자득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정치 한번 잘못하니 경제가 결딴나는 쪽으로 1백80도 회전하고 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야당과 노조는 어느 나라에 속한 야당이고 단체인가.원칙에도 맞지 않고 현실과는 거꾸로 가는 노동법을 만들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이렇게 말하면 단번에 항의할 것이다.재벌신문 앞잡이고 기업주편에서

근로자를 짓밟는 사용자쪽의 하수인이니 그런 주장을 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법과 제도란 한 정권,한 정당,한 기업의 소유물이 아니다.정권을 넘어선 유효성과 현실성이 있어야 한다.기업 또한 기업주 혼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사용자와 근로자 그리고 소비자가 함께 만들어내는 공적인 존재다.

기업과 나라 경제 입장에서 지금 돌아가는 노동법 개정 논의를 보자면,이야말로 노조 천국의 인기주의에 편승한 페론식 포퓰리즘을 연상케 한다.원칙도 없고 그 흔한 애국심도 보이질 않는다.갚아야 할 빚이 1천억달러고 한해 60억달러 이

자를 내는 딱한 실정의 나라다.노임이 비싸 기업은 외국으로 줄행랑이고 팔만한 물건이 없어 넘어지는게 기업이고 돌아오는 것은 부도수표밖에 없는 지금,수렁 속의 경제를 살리자는 뼈를 깎는 노력이 보이질 않는다.

기업이 넘어지고 두손 놓고있는데 무노동 유임금을 주장할 수 있나.한 사람이라도 더 일해야 될까말까인데 불법파업을 일삼는 노조간부에게 임금을 꼬박꼬박 물어가며 기업하겠다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고용.해고에 탄력성이 있어야

고용이 창출된다는 것은 선진국의 경험에 따라 이미 관행이 된 것이다.기업은 망하는데 근로자 모두를 끌어안고 임금을 올려가며 먹고 살 신출귀몰한 방법이 야당과 노조에는 과연 있는 것인가.

아직도 시간은 남아있다.정치 잘못으로 경제가 파국되고 나라 살림이 거덜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 소지는 아직도 남아있다.기왕 정부 여당에 기대할 것이 없으니 야당이라도 정신을 차리기를 바랄 뿐이다.

다시 노동법 개정의 원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원칙에 충실하든지,경제살리기라는 현실에 주력하든지 두 가지 중 하나라도 확실히 잡는 최소한의 애국심이라도 갖춰야 한다.이마저 없다면 야당 또한 정리해고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참담한 비관론에 빠질 뿐이다.

권영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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