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국민 反기업 정서 팽배…기업들도 위축돼 투자 안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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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이 투자하지 않는 첫째 이유가 정부.국민의 반기업 정서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재정경제부 전국경제인연합회 파견'이라는 직함이 적힌 명함을 기자에게 내민 신제윤(46.부이사관)국장의 말이다. 지난달 12일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재계의 본산인 전경련에 정부.기업 간 창구역을 하라며 그를 파견한 지 한달여가 지났다. 신국장은 "그간 4대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을 만났고, 일본 도요타 자동차를 방문하는 등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요즘 최대 경제 과제는 역시 투자다. 대기업 관계자를 많이 만났다는데.

"놀랍게도 4대 그룹은 미래를 위한 투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 확산된 반기업 정서를 걱정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경영권을 빼앗길까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적대적인 인수.합병(M&A), 경영권 승계, 지주회사로 변신하는 데 따른 각종 규제 문제 등을 우려하고 있었다. 벌써 내년 주주총회를 대비하는 곳도 있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얼마를 투자할 것인가'를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현재 같은 개혁 분위기에서는 '재벌의 경영권 집착'이라고 이들을 몰아세울 수 있다. 그러나 기업을 일구고 투자하는 동기가 경영권에 있다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2, 3세에게 기업을 물려주려는 것은 가문 중시 등 전통적인 유교사상 때문이기도 하다. 매도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어떤 기업인은 '만약 경영권을 빼앗긴다면 여관이나 식당을 해 돈을 벌지 왜 힘들게 기업을 하느냐'고 반문했다."

-해결책은 뭐라 생각하나.

"반기업 정서는 기업의 업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기업들은 지난 수십년간 정경유착과 분식회계 등으로 국민적인 지탄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문제는 알겠는데 답이 없다'는 막다른 생각도 했다. 그런데 지난주 일본 나고야(名古屋)의 도요타 자동차를 방문했다. 도요타도 가족주의 경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국민이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요타를 끔찍이 사랑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도요타는 최근 종합병원을 지어 지역에 기부채납했다. 대학과 놀이시설을 만든 데 이어 내년에는 창조성을 키워주는 대안고등학교도 설립할 예정이다. 도시 이름도 아예 도요타시로 바꿨다. 노사 문제도 부러웠다. 도요타는 지난해 1조엔 이상의 순익을 냈는데도 노사가 합의해 올해로 5년째 임금을 동결하는 모범을 보였다. 정부.국민이 기업을 아끼고, 기업은 정부.국민을 사랑했다. 경제 주체인 정부.기업.가계의 '선순환 구조'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악순환 구조'다. 반기업 정서가 팽배하니 기업도 위축돼 있다."

누가 됐든지 먼저 사랑해야 문제를 풀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단군 이래 최고 잘 사는 나라가 됐다는 소리를 듣는다. 기업의 공이 크다. 정부.국민이 이를 인정해 줘야 한다. 지난 4.15 총선을 치르면서 정경유착의 기업 이미지도 어느 정도 사라졌다. 그만큼 투명성이 확보됐다. 이제는 정부.국민이 나서 '기업 사랑 캠페인'을 해야 할 때다. 그러면 기업도 사회에 대한 책임을 더 느낄 것이다. 그래야 우리 경제가 선순환 구조로 매듭이 풀린다."

-경영권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기업들은 '우호 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는 요구를 많이 했다. 외국인 등 적대적 M&A 위협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를 해 달라는 요구다. 나는 재경부에서 금융정책과장을 거치면서 연기금.금융업체 등이 기업의 주식에 투자할 수 있게 허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들은 순수 투자 목적으로 주식을 사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업은 우호 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정부가 경영권 보호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 기업이 투자하고 경영에 전념할 수 있다."

-최근 공정거래법 개정(재벌계 금융보험사 의결권 축소 등)에 대한 논란은 어떻게 보나.

"부처 간 합의가 된 만큼 이젠 기업들에 시간을 줘야 한다. 정부 정책이 기업에 불안을 줘서는 안 된다. 삼성이 추진하는 기업도시도 마찬가지다. 도요타시를 가 보니 기업이 공장을 짓겠다고 하면 지방자치단체가 땅을 대신 사주기도 한다고 했다. 우리도 지자체가 적극 나서 기업을 도와야 한다. 개발이익은 그 다음 문제다."

-친기업주의자가 됐다고 비판받지는 않는가.

"기업이 불안을 느끼는 세 가지가 있다. 경영권 불안과 노사 불안, 규제(정책)불안이다. 주변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다가 혼나기도 했다. 기업인들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지 않고 2, 3세한테 물려 주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또 규제는 공익 목적으로 한다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이런 문제가 기업에만 책임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정부 부처의 경우 자기 조직의 '끝발(권한)'을 위해 규제하지 않았나 되씹어 봐야 한다. 정말 공익을 위한 규제를 만들었나도 반성해 봐야 한다. 또 일부 기업인의 문제를 전체 기업의 문제로 동일시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과거 농업국가 때는 국가의 생산 주체인 농업인을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했다. 그런데 산업국가로 바뀌어 생산 주체가 기업인이 됐는데 '기업천하지대본'은 안 되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기업인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기업인들은 공무원.언론인.사회단체.정치인 등을 찾아다니며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젊었을 때는 사장을 선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교사, 공무원, 판.검사 등 안정된 직업만을 꼽고 있다."

-최근 대기업들이 투자를 빌미로 정부를 협박(개혁 저지)하고 있다는 시각에 대해서는.

"와서 보니 대기업들이 조직적이고 통일적으로 정부에 반항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기업은 각자 돈벌이가 될 것 같으면 누가 떼어 말려도 투자하는 속성을 보였다."

-이헌재 부총리가 가장 총애하는 사람을 전경련에 보냈다고 하는데.

"李부총리는 이번에 부임한 뒤 처음 알았다. '이헌재 사단'이라는 것은 고정된 사람들이 아니라고 본다. 李부총리는 나를 파견하면서 두 가지를 주문했다. 기업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빠짐없이 전달해 달라는 게 첫째였다. 다음은 재계에 기업가 정신을 고취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전경련에 파견 나온 것에 대한 개인적인 소감도 있을 텐데.

"내 아이가 반기업 정서를 갖고 있어 깜짝 놀랐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경제교육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경제를 걱정한다. 내가 정년퇴직할 때쯤 연금도 못 받는 나라가 될까 우려한다. 요즘 '록펠러가의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그들은 뇌물 증여 등 악덕 기업인의 전형이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자선사업을 바탕으로 록펠러가를 진정한 기업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우리 기업들도 이랬으면 좋겠다."

김시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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