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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통곡하는 법치주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법이란 성격상 국경을 초월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규범으로 이해돼 왔으나 오늘날 급속한 세계화가 진행되면서부터는 많은 분야에서 점차 합리성에 바탕을 둔 초국경적인 만민법이 생성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세계화로 인해

형성되는 지구촌 한마당에서는 마치 운동선수들에게 경기규칙이 필요하듯 새로운 활동무대에서 이루어지는 인간활동의 준칙과 공정한 경쟁원칙이 가장 필요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법이다.따라서 세계화는 바로 계약사회의 바탕위에 법치주의의 확립

을 의미한다.

상처투성이 우리 法현실

그러나 눈을 국내로 돌려 우리나라의 법치주의 현황을 보면 국민들이 아직도 가지고 있는 농경시대적 법의식과 정치권력에 눌려 상처투성이가 된 법현실이 우리를 통곡하게 만든다.법이 없고 인권이 탄압받던 군사독재시절 법학자로서 별로 할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법이 정권유지의 도구로 필요할 때만 강조되는 꼴을 보기 싫어 선진국에 한국법을 전파하는 작업에 골몰한 일이 있다.

우선 헌법은 건국 이후 무려 아홉번이나 뜯어고쳐 누더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고 역대 통치자가 헌법을 제대로 준수한 경우가 드물다.아직도 정치적 위기나 교착상태가 발생하면 마치 모든 원인이 헌법에서 비롯된다는 듯 권력구조개편을 위

한 개헌을 운운하고 있으니 이런 발상도 역시 헌법이란 당대 통치자의 몸집에 맞추어 편리하게 재단할 수 있는 옷쯤으로 생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형법은 어떤가.죄를 져도 형법의 적용을 안 받는 치외법권층이 있는가

하면 정권유지상 단죄해야 할 때에는 확대해석을 해서라도 유죄로

법적용을 하기도 하고 수많은 형사특별법을 제정해 법체계를 혼란시키고

있다.형사소송법은 범죄수사와 형

사재판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본절차법으로서 인권보호의 보루임에도

불구하고 구속수사를 원칙으로 해 온 수십년의 관행이 말하듯 정권유지와

인권탄압의 효율적 도구로 봉사해 왔다.

특히 검찰의 부끄러운 수사행태와 너무나도 재량을 일탈한 기소여부

결정은 사실 대부분의 소박한 국민에게 이 나라에는 법이 없다고 외치게

하는 직접적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행정법은 어쩌면 그렇게도 규제일변도로 국민을 시시콜콜하게 얽어매

못살게 굴고 당대 정권의 무리한 정책집행을 합리화하는 수단이

되어버렸을까.행정법체계의 난맥상을 보여주는 백미(白眉)는

세법이다.세법이 너무 어렵고 불편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세감면규제법이 규정한 세금감면혜택의 명분과 대상은 당대의

강자나 정권유착기업이나 재벌들의 농간 또는 비호의 결과일 뿐이다.

노동법과 환경법은 과거 군화에 짓밟혀 숨도 못 쉬었고 가장

기피대상이어서 전문가를 제대로 양성하지 못한 분야다.

노동법은 건국 초창기 우리의 경제현실과 동떨어진 입법을 해 노사간에

아무도 이를 지키지 않다가 경제성장 제일주의의 미명아래 혹독한 수난을

겪었다.박정희(朴正熙)정권은 외국인투자기업에는 노조를 일절 금지한다는

내용의 특별법을 제정하

고는 이를 외국기업의 투자유인으로 널리 선전하기도 했다.오늘날 노동법

개정과 관련해 정부.여당이 우왕좌왕하는 것은 그동안 이 분야를 철저히

탄압해 전문가를 양성하지 않은 데도 원인(遠因)이 있다.

예측가능.안정성이 중요

환경법도 온갖 천대를 받다가 공다투기 좋아하는 공무원들이 경쟁적으로

선진국의 앞선 제도를 모방해 고도수준의 입법을 해놓고는 법의식이

따라가지 못해 지켜지지 않는 대표적 분야다.쾌적한 환경에서 강한 경제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생명가치

와 경제가치의 대립속에서 경제성장만 앞세우는 정부의 무정견과 국민의

인식부족으로 인해 환경법은 제대로 집행되지도 못했고 마침내 후손에게

쾌적한 환경을 물려줄 수 있을지 두렵다.

법은 국민에게 예측가능성과 안정성을 주어 편안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규범인 동시에 국제적으로 공정한 경쟁원칙을 담보하는 수단임을 정부가

깊이 인식해 편의행정을 버리고 투명한 입법과 합리적이고 일관적인

법적용을 통한 법치행정을 펴나가야만 적자생존의 세계화시대에 낙오하지 않을 것이다. 宋 相 現〈서울대 법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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