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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필링>영화평론가는 과연 천박한 정보 유포자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우연히 신문에 실린 문화비평가의 글을 읽었다.그는 지금 망령처럼 매스컴에 실리는 영화평의 유행에 대해 개탄을 늘어놓은 다음,도대체 이 이상한 전염병은 어디서 온 것인지를 물었다.그는 또 비평이라 부르기엔 너무 천박한 수준의 글들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것은 우리 시대의 문화가 얼마나 표면만을 스쳐 지나가는지 참으로 불행한 일이라고 걱정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나와 나의 동료들과 또 나와 유사한 직업을 가진 모두에게 보내는 이 충고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았다.우리들은 천박한 정보를 유행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기 위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우리들은 문학비평가들

이나 아니면 우리 곁에 인접한 다른 예술비평가들에 비해 정말로 그저 표면 밖에 알지 못하고 어리석은 투정만 부리는 심술쟁이들에 지나지 않을까.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그렇다면 그동안 침묵을 지키다 어느날부터인가 갑자기 영화에 대해 비평하기 시작한 문학비평가들이나 소설가.시인들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그들은 왜 어느날 갑자기 영화에 대해 관심이 생겨난 것일까.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왜 어느 영화평론가도 문학이나 음악,또는 회화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걸까.

내게 그순간 떠오른 롤랑 바르트의 충고는 이상하게 우리 시대를 설명하는 것같았다.영화는 입을 쉽게 열게 만드는 매체다.그래서 영화를 보고나면 누구라도 거기에 한마디할 수 있을 것같은 이상한 유혹에 빠지게 된다.그것은 영화가 이미지의 기계장치며,동시에 이야기를 전달하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말하자면 영화라는 표현은 그 드러난 이미지의 속성이 사실은 이야기라는 양태를 통해 사람들 속으로 연장되고 사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영화를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닌 다

른 것이 되는 것이다.그래서 영화를 말하기란 점점 더 쉬워진다.

나는 오히려 모든 영화평론가들에 대한 비난을 즐겁게 생각한다.왜냐하면

이'모든'이라는 말 속에는 거꾸로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이를테면 영화를 비평하기 위해 어떤

제도적 수업을 받아야 하

거나 아니면 제한된 패거리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어울려 놀아야 할

필요가 없다.그 반대로 영화에 관해 말하는 것은 언제 어느 곳이든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말하자면 영화에 대해 말하기 위해 꼭 영화평론가가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영화에는 누구나 쉽게 입을 열게 만들 수 있는 의지가 있는

것이다.오히려 내가 궁금한 것은 그 의지가 어디서 오는가이며,왜 그

의지가 지금 우리 곁에 도착했는지다.그것은 아마도 영화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둘러싼 우리로부

터 나오는 것일지 모른다.만일 그러하다면 우리를 천박하게 만드는

영화,서로의 경계를 넘나들게 만드는 영화,망령처럼 매스컴을 포위한 이

영화를 말하게 만드는 의지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만들어내는가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담론이 부정이 아니라 생성이며,영화에로의 의지가

영화의 의지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기꺼이 이러한 토론에 참여할

생각이라면 나는 영화평론가들을 비난하는 한 대중문화비평가의 충고를

진심으로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다.이제 당신 차례다. 정성일〈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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