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건 (張騫) ① 동양의 탐험가, 비단이 열어준 길에 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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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명령으로 서쪽 길에 들어서다.

323굴의 한무제, 8세기


실재했던 길이지만, 환상으로 난 길. 실크로드는 그렇게 두 세계의 혼융이다. 어쩌면 길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그것은 예정됐는지도 모른다. 정주민이 아니라 유목민들의 들고나는 방향을 따라 생긴 길, 그게 바로 실크로드다.

실크로드 사막주변의 딱딱한 비탈길들은 특히 낙타가 걷기에 적합했다고 한다. 덕분에 훗날 큰 무역상들이 가장 아끼는 통로가 되었다. 사막의 비탈길을 중심으로 호탄왕국, 누란왕국과 같은 오아시스의 왕국들이 번성했다. 실크로드 이전부터 이미 동서양이 이미 교류의 끈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실크로드를 개척한 최초의 동양인으로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장건(? ~BC 114)이다. 중국의 최근 자료들에 따르면 장건은 한(漢)나라 시대 최초로 비단길을 개통한 인물이며 위대한 장군이다. 하지만 옛 자료들에 남아있는 그 이면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흥미로운 사연들이 숨어있다. 장건은 장군 출신은 아니었고 지금의 산시성에서 태어난 하급 관리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타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가 유명한 탐험가의 대열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은, 한(漢)무제의 야망 덕이었다. 장건은 자신의 당대를 제 나름의 방법으로 뜨겁게 호흡하면서 비로소 탐험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역의 땅이 비밀의 베일에 가려져 있던 한 무제 때의 정세를 들여다보자.
당시 북아시아 최초의 유목 제국인 흉노가 막대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여러 오아시스 국가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한나라 역시 그들의 지배 아래에서 매년 술이며 곡물, 약재, 옷감 등의 조공을 바쳐야만 했다. 이에 한나라 무제는 흉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방법을 강구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절세미녀들과 귀중한 보물을 조공으로 바쳐도 흉노들의 횡포가 잦아들지 않자 무제는 일리강 유역의 대월지국과(현재 아프가니스탄 부근) 동맹을 맺기로 용단을 내렸다. 동맹만 맺을 수 있다면 야비한 흉노들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당시에는 대월지국이 있는 서쪽의 지리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저 서역에 대한 신비롭고도 무서운 이야기만 전설처럼 떠돌 뿐이었다. 제 아무리 권력이 막강한 한 무제라도 이런 분위기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왕실에서는 서역의 탐험길에 오르면 큰 상을 내리겠노라 전국에 방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상상력이 남다른 중국인들의 특성상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서쪽의 괴물에게 처녀를 조공으로 바친다는 둥 흉흉한 소문만 커지고 있었다. 이때 지방의 하급 관리였던 장건이 서역의 탐방 임무를 자청했다고 하나 이를 증명해주는 정확한 자료는 없다. 일부 학자들은 왕이 일부러 힘없는 하급 관리를 지목해서 모두가 꺼려하는 서역행 임무를 명령한 거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장건은 흉노족에서 벗어나려는 한 무제의 책략으로 인해 우연히 탐험가의 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때는 기원전 139년경, 장건은 사절단 100여명을 이끌고 장안을 출발하여 대월지국을 향해 떠난다. 이는 국가의 앞날을 좌지우지할 대단한 모험이었다. 당시 사신단의 모습은 지금도 중국 둔황 석굴에 벽화로 잘 남아있다. 그러나 사신단의 행진은 출발이 좋지 못했다. 사절단이 황하를 건너자마자 서쪽의 흉노에게 포로가 되고 만 것이다. 월지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흉노지역을 통과해야만 했는데 흉노의 선우에게 붙잡힌 장건은 장장 10년 동안이나 흉노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 장건의 귀화를 확실히 하고 싶었던 흉노의 왕은 그에게 처녀를 내려 가족을 일구게 했으니 표면상으로는 한 무제의 서역탐험 임무가 모두 수포로 돌아간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십년 정도 잠잠하게 잘 생활하던 장건이 어느 날 흉노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부하들을 데리고 서쪽에 있는 대원국(중앙아시아 페르가나 지역)으로 탈출하는 일이 벌어진다. 한 무제의 서역 탐방이 무려 십 년 만에 재기되는 상황이었다.

비단이 열어준 신세계

장건의 비단길 개척

장건출사서역도

고생 끝에 대원국에 당도한 장건 일행은 또 다시 포로생활을 하게 될까봐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다행히 대원국의 왕은 한(漢)나라의 우수한 문화와 비단에 관심이 매우 깊었다고 한다. 평소 한나라와 화친을 맺고 싶었던 대원국왕은 한 무제의 서역 탐험단에게 매우 조심스럽게 예를 갖추었고 그들이 월지국으로 갈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덕분에 장건 일행은 강거(키르키즈)를 거쳐 강거 지방 주민의 도움으로 대월지(우즈베크 지방)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월지왕은 한나라와의 동맹을 거절했다. 십 년간의 포로생활을 감내하여 천신만고 끝에 찾아간 서역의 땅에서 장건은 처참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빛나는 기지를 발휘한 장건 일행은 최대한 많이 보고 들으며 서역의 문화를 몸으로 익혔다. 그 중에서 가장 큰 획득은 서역의 지리를 파악했다는 점이었다. 장건 일행들로 인해 서역의 베일이 벗겨진 것이다.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서역의 괴물들은 존재하지 않았고 이국적인 문화와 풍요로운 분위기만이 서역 땅 구석구석에 흐르고 있었다. 사신단 임무는 실패했지만 서역에 대해서 워낙에 아는 바가 없었기에 당시에는 이 정도 수확만 해도 나쁘지 않은 여행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한(漢)나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었다. 가다가 또 포로로 잡히거나 죽는다면 모든 고생이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그래서 장건 일행은 세력이 강했던 흉노를 피해 남쪽 길을 따라 카슈가르, 야르칸트, 우전, 누란에서 차이담 분지를 지나 농서에 이르는 비단길의 남쪽 길인, 일명 서역남로를 이용하여 돌아오는 길을 잡았다. 하지만 그 중간에 흉노에게 붙잡혀 또다시 1년여 동안의 포로 생활을 견뎌야 했다. 그 후 탈출에 성공하여 천신만고 끝에 장안으로 돌아오는 것에 성공했으니 때는 기원전 126년경 중국 사회에서 비로소 서역을 향한 베일이 벗겨지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왕실에서는 이 날을 비단의 날이라 불렀는데, 이후 비단으로 화친을 맺게 된 대원국이 애초에 안내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이마저도 모두 불가능했으리라는 감격과 함께 탄생한 이름이다. (계속)

자료조사 / 이승호
사진 출처 : 중국 양관역사자료실

프리랜서 장정순, 워크홀릭 담당기자 설은영 e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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