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왜 高총리 제청권 거부 했나] 소신 지키기냐 이미지 심기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25일 오전 9시20분쯤 청와대에서 국무총리 집무실로 돌아온 고건 총리는 오후 5시30분 열린 이임식 전까지 조용히 이삿짐을 꾸렸다. 특유의 깔끔한 성격답게 직원들을 시키지 않고 직접 사저로 가져갈 책과 서류들을 챙겼다.

앞서 이날 아침에는 노무현 대통령과 조찬을 함께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대통령 비서실장과 국무조정실장 등이 동석했다. 이 때문에 불편한 속내를 털어놓긴 어려운 자리였을 것이다. 서울 명륜동 자택 부근의 동네 목욕탕에서 盧대통령과 인연을 맺어 참여정부 초대 총리를 맡았던 高총리는 이렇듯 어색하게 盧대통령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高총리는 이날 사실상 공직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1961년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한 뒤 세번의 장관과 두번의 서울시장에 이어 두번의 국무총리를 거치면서 '행정의 달인'으로 불린 그는 최근 새로운 별칭 하나를 더 얻었다. '소신 총리'다.

노무현 대통령의 각료 제청권 행사 요청을 삼고초려에도 불구하고 거부한 때문이다. 국무총리실과 청와대 등의 홈페이지에는 그의 제청권 거부가 '소신 있는 행동'이었다고 평가하는 의견들이 대다수다.

평소 국정운영에 협조적이었던 그가 요청을 거부한 채 사표를 던진 것은 이례적이다. 따라서 그 배경을 놓고 뒷말도 무성하다. 이에 대해 高총리는 이임식 직후 기자들을 만나 "5월 마지막주에 사표를 내는 일정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면서 "사표를 제출하는 입장에서 제청권 행사를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그럼에도 총리실 관계자들은 "각료제청권은 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는데, 사퇴를 기정사실화한 총리가 새 장관을 제청하는 것은 헌법정신 훼손 내지는 편법운영이라는 생각을 高총리가 갖고 있었다"고 전했다.

高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하면서 헌법 수호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해 이런 강수를 던졌다는 주장도 총리실 주변에서 나온다.

또한 한때 대권후보로 거명되던 高총리로서는 청와대가 차기 대권주자 경력관리를 위해 사전에 高총리와 협의도 거른 채 개각을 서두르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정치권 일각에는 대권의 꿈을 접지 않은 高총리가 강직한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어놓기 위해 각료제청권을 거부했다는 소리도 있기는 하다. 高총리는 '정치를 할 생각이 있느냐'는 기자질문에 "재수총리를 졸업했으니 산에도 오르고 바다에도 좀 가보고"라며 말끝을 흘렸다.

이철희 기자<chlee@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