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국정>2. 무책임한 관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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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보철강 부도 나흘뒤인 지난 1월27일.경제정책의 총 책임자인 한승수(韓昇洙)부총리겸 재경원장관이 한보사태후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96년 정태수(鄭泰守)한보그룹 총회장을 두번 만났으나 대출건과는 무관하다”고 해명했다.“한보철강의 담보가치가 부채보다 큰데 대출과정에 외압이 있었겠느냐”는 부연설명도 곁들였다.그게 전부였다.한보사태로 온나라가 들끓고 경제는

더욱 만신창이가 돼가는데도 정부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얘기는 없었다.

그는 그러고서도 계속 침묵을 지켰다.그러다가 부도후 18일만인 2월10일에야 비로소 관계장관 대책회의를 소집했다.그 사이 한보문제는'하나의 있을 수 있는 금융사고'로 차관급 실무대책위(위원장 林昌烈.재경원차관)손에 맡겨져 있었다.

이 대책위는 회의를 딱 한번 열었을 뿐이다.

관계장관회의 또한 결과는'역시나…'였다.자성(自省).자책(自責)은 없이 중소기업에 대한 경영안정자금대출등 땜질식 처방만을 내놓았기 때문이다.“한심하다”는 비난여론이 더욱 거세진 것은 당연했다.

그러자 14일 안광구(安光구)통산부장관이 韓부총리보다 앞서'선수'(先手)를 쳤다.당진제철소를 방문,연쇄부도 위기에 빠진 한보협력업체 관계자들을 만나 고충을 듣겠다고 나선 것이다.그런데 물정도,법규도 모른채 내려간게 화근이었다.

安장관은 협력업체 사람들이“공정 10%인 제철소내 화력발전소를 하루속히 완공토록 해달라”고 요청하자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그 순간 배석했던 한전관계자가“법규정상 안된다”고 쐐기를 박았다.安장관은 머쓱해졌고 기업인과 기자들은 눈

총을 보냈다.

18일에는 韓부총리가 당진에 갔다.그는 17일 신한국당 의총에서

“잘못없다”고 용감하게 말했다가 사방에서 호된 비난과 질책을 받았던

탓인지 이번에는 자세를 바꿔“책임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런 태도는 19일에도 이어졌다.재경원은 韓부총리와

安장관,신상우(辛相佑)해양수산부장관,이수휴(李秀烋)은행감독원장이 20일

합동으로“정부가 책임을 통감한다”는 내용의 대(對)국민사과 담화문을

내고 기자회견을 갖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막상 20일이 닥치자 정부는 또다시 변덕을 부렸다.“곧

국회상임위가 열리므로 그때가서 정부 입장을 밝히겠다”며 담화문 발표와

기자회견을 취소해버린 것이다.

이같은 행태에 대해 신한국당의 한 중진의원은“한보사태 원인중 하나로

장.차관등 최고위 행정관료의 무사안일.책임회피.해바라기 성향을 꼽을 수

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것같다”고 개탄했다.

“관료들이 이 고질병을 고치지 못하는한 한보같은 엄청난 비리사건이

재발할 가능성은 높다”는 우려도 내놓았다.

신한국당의 또다른 의원은“장관들이 예나 지금이나 너무 자주 바뀌는

바람에 그들 스스로 과객(過客)이라는 인식을 갖고 쉽게 보신주의에

빠지는 풍토가 대형사건 발발의 중요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얼마전 열린 경제장관회의.간담회 때의 일을 각료 몸사리기의

또다른 사례로 제시한다.두 회의에서

辛해양수산부장관.손학규(孫鶴圭)보건복지부장관.신경식(辛卿植)정무장관

은 금융실명제 부작용을 지적했다.

“돈이 자꾸 지하로 들어가고 잘 돌지 않아 경제난이 더한층 심화되고

있다”며 韓부총리에게 보완책 강구를 촉구했다.

그러자 韓부총리는“실명제는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가장 위대한

업적인만큼 그에 대해서는 이러쿵 저러쿵 거론하지 말길 바란다”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이 여당의원은“얘기 내용을 경청하지도 않은채 무조건'대통령

업적이므로 건드리면 안된다'는 그런 경직성 때문에 각종 문제들이 사전에

체크.제거되지 못하고 결국 한보처럼 최악의 상황에서 곪아 터져버리는 것

아닌가”고 언짢아 했다.

통산부의 한 관계자는“한보의 코렉스공법 도입은 과장전결 사항이며

통산부의 金대통령에 대한 당진제철소 1단계 준공식 참석 건의에 관해선

아는바 없다”고 말한 박재윤(朴在潤)전 통산장관에게 이렇게 실망감을

나타냈다.

“朴전장관이 재임중 과장들과의 술자리를 같이하면서

여러차례'전두환(全斗煥)전 대통령에게 장세동(張世東)이 있었듯이

金대통령에겐 이 박재윤이가 있다'고 말했다.그런데 이제와서 대통령에게

누(累)가 되든 말든 혼자만 살려는 모습을 보

고 대통령이 정말로 인사(人事)를 잘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료들이 보신엔 능한 반면 책임지는데는 둔하니 무슨 일이 생길때마다

국정(國政)이 중심을 잃고 표류하는 것은 당연하다.그 바람에 정부가 꼭

해야할 일은 완전 실종되거나 저만치 뒤로 미뤄진다.그나마 뭘 좀

해보겠다고 세운 각종 정책

마저도 뚜렷한 까닭 없이 바뀐다.

대만이 핵폐기물을 북한땅에 처분하려는 것을 두고“자기 땅에서

처리하는게 국제관례”라고 성토해온 우리 정부는 여태 핵폐기물 처분장소

하나 제대로 선정하지 못하고 있다.나웅배(羅雄培)전

경제부총리-구본영(具本英)전 경제수석이 의욕적으

로 추진한 공기업 민영화는 韓부총리-이석채(李錫采)경제수석에 의해

사실상 백지화됐다.

한.약분쟁도 정부의 해결능력.의지 미흡으로 그 불씨가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물관리 체계 일원화와 맑은 물 대책도 그 실체를 찾아보기

어렵다.그런 가운데 제 밥그릇 챙기는데는 저마다 열심이어서 청와대부터

직원들의 직급을 상향조정했다

(차관급이었던 정무.경제수석과 경호실장의 장관급으로 격상등).공무원

전체 숫자도(오른쪽 위박스 그림 참조)문민정부 초기보다 늘어나'작은

정부'는 실현되지 못했다.

김석준(金錫俊.이화여대 정치행정학)교수는“한보사태는 정부실패의

대표적 사례”라며“정책결정및 집행과정의 투명성과 관료의 책임의식을

높이기 위해선 누가 정책을 입안.결정.수정했는지 밝히는 정책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정치성이 강한 장관이 일을 잘못 챙기더라도 직업관료제가 잘

가동되면 큰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면서“뉴질랜드처럼 공무원 책임의식

고양을 위해 인사제도를 개편하거나 싱가포르처럼 공무원 부패는 엄단하는

대신 자긍심은 확실히 키워주는

정책구사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최고위관료들의 자질검증을 위한 인사청문회 도입,부패방지법 제정등을

검토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金교수와 박동서(朴東緖.서울대 행정학)교수는“그러나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일은 사람이 하는만큼 대통령이 장.차관등 사람을 잘 쓸 수 있도록

고민하고 노력하는게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긍지와 책임감에 투철한 전문 직업관료 집단이야말로 안정된 국정운영의

대들보다.

눈치보기.발뺌하기.해바라기성 관행이 체질화된 상황에서 책임행정은

뿌리를 내릴 수가 없다. <이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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