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미술작가 19명의 '무대를 보는 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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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출신으로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 작가 킨 유펜의 무대미술 ‘색채의 전설’. 높게 걸려 관람객을 굽어보는 마오 인민복은 굽이굽이 중국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보는 이를 상상의 인생극장 속으로 데려간다.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이 즐겨 입었던 인민복이 높다랗게 매달려 우리를 굽어본다. 유리 천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속에서 노랗고 검은 인민복은 황하를 따라 출렁이던 권력처럼 반짝인다. 중국 출신으로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킨 유펜의 작품'색채의 전설'에서 마오 인민복은 과거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인민복 사이를 떠도는 시적 상상력이 우리를 역사의 무대로 데려간다.

서울 태평로 로댕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무대를 보는 눈:독일현대작가전'은 이렇듯 한바탕 연극으로 비유할 수 있는 인생 극장으로 보는 이를 이끈다. 독일 현대 미술가 19명이 꾸민 배우 없는 무대는 즉석에서 관람객을 출연시키며 유랑극단의 아득한 얘기를 불러온다.

로댕갤러리의 중심을 이루는 로댕의 대형 조각'지옥의 문'앞에는 칼하인츠 셰퍼가 다시 한번 해석한 '지옥의 문'무대가 펼쳐져 있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을 셰퍼는 속이 빈 둥근 구로 표현했다. 깨진 두개골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듯 보이는 찢어진 껍데기들 앞에서 우리는 부서지기 쉬운 한낱 벌레 같은 우리를 본다. 귄터 위커는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무대를 금속 원통을 뚫고 나온 뾰족뾰족한 못과 깨진 유리, 거친 돌무더기로 묘사했다. 황금반지를 둘러싼 다툼이 멸망의 비극 속에 잠겨버렸음을 드러낸 황량한 공간이 보는 이를 부르르 떨게 만든다.

한스 페터 쿤은 '가운데 자리'로 관람객 모두를 초대했다. 네개의 기둥이 솟아 있는 가운데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가듯 그곳에 앉은 이는 기둥에 장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극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손을 들어도 좋고 얼굴을 찡그리거나 다리를 흔들어도 좋다. 물방울 소리인가, 자연의 함성인가, 군중의 박수소리인가, 지렁이가 기어가는 소리인가, 다 괜찮다. 무언가 야릇한 느낌을 받고 일어선 관람객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다.

전시장을 돌아본 이홍복 갤러리 삼성플라자 관장은 "현대 예술에서 연극은 대사가 아닌 시각효과의 극대화 작업으로, 미술은 새로운 매체와 설치를 통한 연극적인 놀이로 그 영역을 넓혀 왔다"며 "이번 전시는 미술과 연극과의 관계를 주제로 한 또 한편의 연극"이라고 평했다.

29일과 6월 19.26일 오후 2시 전시장에서 무대미술가 윤정섭, 연출가 이윤택, 미술평론가 박신의씨가 미술과 연극의 만남을 주제로 한 갤러리 강좌를 펼친다. 8월 8일까지(월요일 휴관). 02-2259-7781.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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