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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장쩌민의 17년 동반세월-경제특구로 개혁師第 인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장쩌민(江澤民)동지를 중심으로 하는 당중앙 지도체제는 정확한 선택이다.그가 당 총서기로서 자격이 있는 만큼 군사위 주석으로서도 자격이 있다.”

지난 89년 11월 덩샤오핑(鄧小平)이 마지막 공식석상인 중앙군사위 확대회의에 나타나 군에 대해 江주석 지지를 당부한 연설이다.

鄧이 江주석에게 중국 대륙의 미래를 맡긴 것은 결코 한 순간의 결정이 아니다.78년 최고 권력을 움켜쥔 鄧은 선전(深수)경제특구 설치를 구상한다.이때 해외연구조사단을 맡은 사람이 바로 江주석.중국 역사를 결정지을 두 사람의'빛과

그림자'같은 17년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鄧이 江주석을 차기 지도자감으로 인정한 것은 江주석이 상하이(上海)에 근무하던 시절.江주석은 85년 전자공업부장(장관)에서 상하이 당위(黨委)부서기로 이동,한달만에 시장으로 승진한다.

89년6월 천안문사태는 江주석이 정치적으로 도약하는 계기라 할 수 있다.상하이 시장이었던 江주석은 6.4사태때 학생들 앞에 직접 나가 이들을 설복해 시위를 막았다.

鄧은 민주적 개혁을 주장했던 자오쯔양(趙紫陽)총서기를 쫓아낸 뒤 보수파였던 리셴녠(李先念)이 강력하게 추천한 江주석을 마침내 새로운 당 총서기로 기용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가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江은 취임이후 보수파를 의식,개혁.개방에 소극적 자세를 보이고 이에 대해 鄧은“江에게는 용기와 비전이 없다”며 불만을 표출한다.

이같은 불만은 92년 鄧이 남쪽 지방을 방문해 개혁.개방을 역설했던'남순강화(南巡講話)'로 터져나왔다.

당시 개혁.개방의 부작용이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경제가 바닥을 헤맬 때이나 鄧은“저속 성장은 후퇴와 같다”“개혁을 추진하지 않는 사람은 물러나야 한다”고 몰아세웠다.

이에 깜짝 놀란 江주석은 태도를 1백80도 바꿔 개혁의 선봉을 자임하고 나섬으로써 鄧의 의심에서 벗어났다.

鄧은 어쨌든 江이 권력중심부에 자리잡기 전까지 그의 정치적 후견인 역할을 충분히 했다.이때문에 江은 춘절과 鄧의 생일(8월22일),그리고 중요한 정치 일정이 있을 때마다 鄧을 문안하고 의견을 구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이

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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