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앵커도 로스쿨로, 법조 엘리트 DNA 바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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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호 01면

강사 생활 20년 “절망이 나의 힘”
“합격을 축하한다”는 기자의 말에 “이웃과 김장을 하던 중”이라는 대답이 전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광주광역시 산수동에 사는 송지현(47)씨는 1인 다역의 수퍼우먼이다. 국문학 박사이자 시인인 송씨는 모교인 전남대 언어교육원에서 9년째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조선대에도 출강하고 있다. 1991년 페미니즘 비평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2003년 월간 ‘시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2남1녀의 어머니이며, 50대 남편의 아내이자 여든이 넘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이기도 하다. 5일 그에겐 ‘예비 법조인’이라는 또 하나의 역할이 더해졌다. 전남대 로스쿨에서 합격 통지를 받은 것이다. 전남대 최고령 합격자다. 합격자 120명 중 대부분이 20대에서 30대 초반이다.

합격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그는 “다시 대학원생이 된다는 설렘도 있지만, 반짝이는 두뇌와 탄탄한 체력을 지닌 조카뻘 동기생들과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로스쿨에 도전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며 “앞으로의 인생은 관념적 학문 연구보다 실천적 연구와 사회활동을 하고 싶다”고 답했다. 조선대 법대의 현직 교수인 남편과 달리 비정규직 교수(시간강사)로 보낸 20년간의 절망이 도전정신에 불을 질렀다.

지천명(知天命)이 코앞인 나이에 합격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송씨는 2004년 방송통신대 법학과에 편입했다. 신문을 열심히 읽고, 폭넓은 독서를 한 것도 도움이 됐다. 영어는 미국 생활을 한 덕분에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그의 토익 점수는 930점이다. 본격적인 로스쿨 시험공부에 들어가서는 모교에서 제공하는 로스쿨 동영상 강의와 모의고사, 그리고 후배들과 함께한 스터디가 도움이 됐다.

학교에도 고마움을 표했다. 송씨는 “지원할 때 가장 두려웠던 게 ‘나이 많은 여자에 대한 편견이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의외로 공정하고 편견 없이 선발해 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로스쿨 졸업 후 비정부기구(NGO)나 사회적 기업형 법률사무소와 같은 곳에서 일하고 싶어한다. 이상형은 아름다운 재단에서 상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원순 변호사다. 송씨는 같은 꿈을 꾸는 이들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진정으로 새로운 도전을 원한다면 주저하지 마세요. 의욕이 있다면 나이를 개의치 말고 도전하세요.”

시각장애 좌절 속 찾아낸 희망
서울대 로스쿨에 합격한 국가인권위원회 전문상담원 김재왕(31)씨는 시각장애인이다. 2003년까지만 해도 그는 장래가 촉망되던 생물학도였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던 어느 날 갑자기 글을 읽을 수 없게 된 자신을 발견했다. 정밀 진찰을 받은 결과 시신경의 90%가 죽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생물학자의 꿈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됐다. 대학원 자퇴 후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무엇을 하고 살지 앞날이 캄캄했다. 시력이 좋아지지 않을까 기대를 걸기도 했지만 좁아지던 시야는 결국 암흑으로 사라졌다. 1년 반을 그렇게 좌절 속에서 뒹굴었다.

2005년 2월 인권위 상담원으로 다시 세상에 나왔다. 인권위에 근무하는 친구가 “장애인을 배려해 주는 직장”이라고 권유한 덕분이었다. 전화 상담을 하면서 이 세상에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올해 초 인권위에서 함께 근무하는 분이 로스쿨 특별전형 지원을 생각해 보라고 권해 왔다. 같은 상담원으로 만나 결혼한 아내도 한번 도전해 보자고 격려해 줬다. 법학적성시험(LEET) 공부를 시작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예시 문항과 예상 문제를 텍스트 파일로 바꾼 뒤 화면낭독 프로그램(스크린 리더기)을 이용했다. 책을 스캔해 텍스트 파일로 만드는 작업은 아내의 몫이었다.

지난 8월 실시된 LEET 시험은 주최 측의 배려로 컴퓨터를 활용해 답안을 작성했다. 면접 때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으냐”는 교수들의 질문에 “인권위에서 어려운 이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런 분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법조인이 되고 싶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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