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칼럼 책에게 길을 묻다] 보수·진보 뒤흔든 장하준 ‘제3의 성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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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판매만 20만권. 서점 불황을 딛고 거둔 호성적인데, 당연히 인문·사회 분야 1위다. 물론 ‘국방부 마케팅’도 주효했다. 국방부는 8월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포함한 23권을 불온서적으로 발표했지만, “요즘 세상에 웬 금서?”하는 반발과 함께 사회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절묘했다. 사회 현상의 대두에는 오해·편견까지도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법인데, 금서 지정은 장하준 신화의 완성을 위한 월계관이었을까? 지식권력은 반짝 트렌드를 넘어 시대정신을 암시한다. 시작은 1980년대 도올 김용옥. 그의 이름은 동양학에 대한 목마름을 상징했다. 90년대에는 언론학자 강준만이 바통을 이었다. 그의 성역 없는 사회 비판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2000년대 초의 지식권력은 인문학이 갖는 또 다른 매력을 전해준 신화전도사 이윤기. 그렇다면 장하준의 역할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왜 지금 그를 읽는가?

무엇보다 그는 한국사회 치료제다. 이념 논쟁과 세대 간 전쟁을 성찰하기 위해 득의의 카드다. 82학번 장하준은 전형적인 386세대. 이른바 국독자론(국가독점자본주의)·식반론(식민지반봉건사회론), 종속이론 따위를 달달 외우며 한국 사회에 대한 분노를 키우던 그는 영국 생활을 하며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현대사를 보는 한국학계 진보·보수 논쟁의 허점과, 그걸 가능하게 했던 고정관념 내지 촌티를 훌쩍 떨쳐낸 것이다. 그런 생각은 주류 경제학의 정설에 대한 전면 비판으로 이어져 출세작인 『사다리 걷어차기』(2003년 미르달상 수상)에서 빛을 발했지만, 한국 상황에도 많은 암시를 준다. 그는 묻는다. 재벌 개혁과 주주 자본주의 구현이 곧 경제민주화요, 만병통치약일까? 대기업 중심의 경제성장을 깍아내리는 것도 한국만의 자해(自害)가 아닐까? 필요하다면 관치(官治)도 좋은 것이다. 또 국가 중심의 경제 전략이 뭐가 어때서? 그러다보니 그는 한국 현대사와 극적인 화해도 이룰 수 있었다.

거기까지는 영락없는 보수골통이다. 하지만 자유무역협정(FTA), 신자유주의를 정면 비판한다. 진보가 보면 영락없는 보수고, 보수가 보면 진보로 보인다. 양쪽의 고정관념을 흔들며 제3의 성찰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장하준이 아닐까. 만일 그가 한국에서 활동했다면 지금의 그는 없었을 것이다. ‘눈치 공동체’인 학계의 자기검열 구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내부자이자 국외자인 장하준은 고정관념을 버려야 눈에 들어온다. 교양서와 학술서를 겸하고 있어 읽어내기에 부담스럽지도 않다. 숫자나 통계가 없어 구수하다. 마침 세밑이다. 걸어온 길을 점검하기 위해서라도 그를 되읽어보자. 그렇게 공부한 뒤 다음 주 이 코너에서 한 번 더 머리를 맞대볼 일이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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