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 아닌 의사 윤석화도 뜨거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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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호 10면

연극 ‘신의 아그네스’
2009년 2월 14일(토)까지 설치극장 정美소
1월 10일까지 평일 오후 8시, 수 오후 2시ㆍ8시,
토 오후 3시ㆍ7시(일 쉼)
1월 13일부터 평일 오후 8시, 수 오후 2시ㆍ8시,
토 오후 3시ㆍ7시(일ㆍ월 쉼)
문의 02-3672-3001

한 여배우의 힘이 이토록 압도적일 수 있는가. 설치극장 정미소의 ‘신의 아그네스’는 돌아온 윤석화로 인해 이제까지와 다른 작품이 된 듯 보인다. 드레스 리허설 도중 조명 위치까지 깐깐히 챙기며 바깥 소음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던 그는 무대에 대한 지배 본능을 숨기지 않았다. ‘신의 아그네스’의 주인공은 닥터 리빙스턴이다-윤석화는 그렇게 믿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믿고 있기에 작품은 그렇게 흘러갔다. 25년 전 타이틀롤을 맡은 자신을 스타덤에 올려놓았던 바로 그 연극 ‘신의 아그네스’에서.

지난해 문화예술계 학력 위조 파문의 상처는 길고 깊었다. 1년2개월 만에 복귀하는 그에게 쇄도하는 인터뷰는 모두 ‘왜 그랬느냐’ ‘지금 심정은 어떠냐’에 맞춰졌다. TV 쪽 장미희가 ‘학력 관련 질문은 일절 엄금’으로 맞섰다면, 윤석화는 수십 차례 질문에 수십 차례 같은 대답을 했다.

“믿었던 지인들과 사랑해 주신 관객께 죄송하다. 갚을 길은 무대에서 열심히 하는 길밖에 없을 듯하다.” 그리고 그 말을 지켰다. 1983년 뉴욕에서 이 작품을 발굴해 직접 번역까지 했던 초심으로 돌아가 열정을 불살랐다. 아그네스로 떴지만, 실제로는 보다 탐냈던 배역 리빙스턴에 25년 만에 도전했다. “이것이 기적이기에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젖은 눈망울을 빛내며 마지막 대사를 읊을 때 조용한 전율이 흘렀다

‘갓 낳은 아기를 목 졸라 죽인 수녀’라는 충격적 소재를 바탕으로 한 ‘신의 아그네스’는 실험극단 초연 당시 한국 연극계를 뒤흔든 화제작이다. ‘믿음을 둘러싼 진지한 성찰’이라는 호평과 ‘센세이셔널한 소재가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라는 혹평이 엇갈렸지만, 당시로선 최장기(10개월) 최다 동원(10만 명) 기록을 세웠다. 스타 배우 윤석화의 시대를 열었음은 물론이고, 한국 연극계가 부진할 때면 단골로 찾는 인기 레퍼토리가 됐다.

무대 복귀를 검토하던 윤석화의 선택 또한 자명했다. 평소 친분이 두텁던 한지승 영화감독에게 첫 연극 연출을 의뢰해 손발을 맞췄다. 이지적이고 냉철한 정신과 의사 리빙스턴에 불같은 격정을 입힌 자신만의 캐릭터로, 조심스럽고도 당당하게 대중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

윤석화의 복귀작이라는 이유로 스포트라이트가 가리긴 해도 아그네스 역의 전미도 또한 주목할 만한 연기를 보여 준다. 신비스럽고 청아한 목소리를 지닌 앳된 수녀이자 공포와 광기에 짓눌린 젊은 엄마로서 그녀는 윤석화의 아성에 도전하기보다 자기 색깔을 따로 빚어냈다.

정미소의 창작지원 프로젝트였던 뮤지컬 ‘사춘기’에서 전미도의 가능성을 발견한 윤석화가 자신과 함께할 아그네스로 점찍어 한지승 연출에게 추천했다는 후문이다. 아그네스로 더블 캐스팅된 박혜정 또한 윤석화가 발굴해 추천했다. 원장수녀 미리암 역은 한복희ㆍ지영란이 맡았다. 윤석화만 단독 캐스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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