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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고정간첩 파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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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94년 7월 런던 소더비경매장에선 색다른 경매가 있었다.냉전시대 최고의 스파이로 평가되는 킴 필비의 유품이 경매에 부쳐진 것이다.이날 경매에선 15만2천파운드에 유품 전부가 한 출판사로 넘겨졌다.모스크바에서 월(月)25파운드의 연금으로 살던 미망인 일리나는 갑자기 부자가 됐다.

필비는 케임브리지대 재학중이던 1930년대초 도널드 매클린.가이 버지스.앤서니 블런트를 만났다.이들은 모두 공산주의 신봉자였다.33년 필비는 한 소련 스파이에 포섭됐다.37년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필비는 프리랜스 기자로 스페인으로 갔다.기자로서 재능을 인정받은 필비는 더 타임스에 스카우트돼 특파원이 됐으며,제2차 세계대전 초기 서부전선을 취재했다.

40년 영국 정보기관 MI-6에 들어간 필비는 종전 무렵 요직인 방첩부장에 올라 서유럽에서 소련의 파괴공작을 분쇄하는 책임을 맡았다.49년 미국으로 건너가 영국 대사관에서 MI-6와 미CIA를 연락하는 책임자 역할을 했다.이때 필비는 알바니아 반공게릴라를 지원하려는 서방측 계획을 소련에 미리 알려 좌절시키고 MI-6와 CIA의 중요정보를 소련에 넘겨줬다.

51년 필비는 소련 스파이로 의심받던 친구 매클린과 버지스를 비밀리 소련으로 탈출시켰다.이 사건으로 필비 자신도 의심을 받았으나 명백한 증거가 없어 55년 MI-6를 떠나는 것으로 끝났다.그후 필비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기자생활을 재개했다.

63년 1월 신변위협을 느낀 필비는 베이루트에서 종적을 감췄다가 얼마후 모스크바에 나타났다.소련 정보기관 KGB에서 대령까지 승진했으며,68년 자신의 스파이 행적을 밝힌'나의 조용한 전쟁'이란 책을 펴냈다.필비는 88년 5월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북한 노동당비서 황장엽(黃長燁)이 밝혔다는'남한내 고정간첩 5만명'설(說)은 망명 그 자체보다 훨씬 충격적이다.사실 여부는 차차 밝혀지겠지만 헛된 주장만은 아닌 것 같다.간첩은 반드시 색출하고 방첩태세는 강화해야 한다.그러나 黃의 주장만 믿고 매카시즘적'스파이사냥'을 벌일 경우 온나라를 흔드는 대혼란이 올지 모른다.노동관계법.안기부법 파문,그리고 한보사태로 가뜩이나 혼란스런 정국에 간첩문제로 또 한차례 큰 소동이 벌어질까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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