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종수 시시각각

경제위기 속에 벌어지는 치킨 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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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외환위기 때까지 기업들이 급전을 조달하는 투자금융사가 있었다. 속칭 단자회사들이다. 이 단자사들은 기업에 돈을 빌려줄 때 담보로 어음을 받아뒀다. 만기 때 돈을 갚으면 이를 돌려주었기에 어음은 평소에는 그저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그러나 기업의 자금사정이 나빠지기 시작하면 사정이 돌변한다. 종잇조각에 불과하던 어음이 갑자기 기업의 생사를 좌우하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투금사들이 빌려준 자금을 회수하는 수단이 바로 어음이기 때문이다.

어음을 교환에 돌렸는데 결제계좌에 잔액이 부족하면 해당 기업의 주거래은행은 고민에 빠진다. 어음대금의 지급을 거절하면 그 기업은 곧바로 부도가 난다. 거꾸로 대출을 일으켜 어음을 막으면 부실이 커질 우려가 있다. 큰 규모의 기업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최종 부도 여부의 결정은 은행장 손을 떠나 재무부나 청와대까지 올라갔다. 관치금융이 관행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투금사도 만기 전에 함부로 어음을 돌리지 못한다. 자칫 잘못 돌렸다간 멀쩡한 기업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담보어음을 끝까지 움켜쥐고 있을 수만도 없다. 정말 망할 기업이라면 한 푼이라도 먼저 건지는 사람이 임자다. 부도가 나면 담보어음은 한낱 종잇조각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투금사들은 기업의 자금사정에 늘 촉각을 곤두세웠다. 어음을 너무 빨리 돌려도, 또 너무 늦게 돌려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달려오는 기차를 마주하고 서서 누가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느냐를 겨루는 치킨 게임을 방불케 한다.

당시에는 이런 식의 치킨 게임이 거의 매일 벌어졌다. 기업들의 부채비율이 높았고, 부실 규모 또한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 어느 기업이 넘어갈지 아무도 알 수 없었기에 한 치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았다. 어떤 투금사는 어음을 잘못 돌렸다가 은행을 찾아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나서야 어음을 돌려받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졌다.

그런데 다 옛이야기가 된 듯한 추억의 치킨 게임이 요즘 한국의 금융시장에 다시 등장했다. 이 신종 치킨 게임의 참가자는 중소기업과 은행이다. 경제위기로 금융시장이 꽁꽁 얼어붙자 주머니가 얄팍한 중소기업부터 자금난에 빠졌다. 은행은 은행대로 부실화 가능성이 큰 중소기업의 돈줄을 조이기 시작했다. 제 코가 석 자인 은행들은 중기 대출을 늘리기는커녕 대통령의 독려에도 아랑곳없이 대출 회수에 나섰다. 문제는 은행들이 부실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돈줄을 조이면 조일수록 부실 규모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는 역설이다. 더구나 우량·불량 기업을 가릴 것 없이 옥석구분(玉石俱焚)을 하다 보면 멀쩡한 기업까지 부도 위기에 몰리지 않을 수 없다. 은행들이 자기만 살자고 다투어 대출을 회수하다 보면 금융시장 전체로는 어느덧 모두가 망하는 공도동망(共倒同亡)의 길로 점점 다가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부실화할 것을 뻔히 보고도 혼자만 대출 확대에 나설 강심장을 가진 은행도 없다. 결국은 누가 벼랑 끝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느냐를 겨루는 치킨 게임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이 딜레마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 것인가. 해결의 실마리는 서둘러 옥석을 가려주는 것이다. 살릴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을 한데 뭉뚱그려서는 이 치명적인 치킨 게임을 피할 수 없다. 다 함께 살자는 이른바 대주단 방식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런 점에서 최근 논의되고 있는 기업구조조정위원회는 진일보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외환위기 때 정부 주도로 운영했던 구조조정위를 민간 버전으로 바꾼 것이다. 여기서 관건은 과연 민간 구조조정위가 어느 정도의 법적 구속력을 가질 수 있느냐다. 그렇다면 은행들이 구속력있는 협약을 맺어 구조조정위의 결정을 전적으로 따르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자멸적인 치킨 게임을 구조조정의 회생 게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것만이 자금경색을 풀고 경제위기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