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D 공포’ 한은만 ‘물가 안정’ 타령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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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이 경제 불황으로 빠져들면서 디플레이션(장기적 물가하락) 우려가 높아지는 가운데 한국은행이 최근 인터넷 홈페이지에 ‘한국은행=물가안정’이라는 메시지를 띄워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한은은 지난달 17일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물가안정, 한은이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약속’이라는 문구와 물가안정 목표(3.0±0.5%포인트)를 부각시켜 올렸다.

지난 여름까지도 우리 경제는 원ㆍ달러 환율 급등에 따른 물가 상승 압력으로 디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이 없다는 분석이 나왔었다. 그러나 10월 소비자물가 곡선이 8월에 비해 하강 추세가 뚜렷해지고 소비재 판매가 2003년 8월(-5.9%) 이후 5년 2개월 만에 최저치(-3.7%)로 떨어지는 상황을 맞았다. 주요 국내외 기관이 한국 경제의 내년 성장률을 2%대로 낮추고 각 기업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D의 공포’가 드리우고 있다는 주장이 우위에 선 국면이다.

그럼에도 한은이 ‘물가 안정’을 강조하는 문구를 띄우면서 일부에선 정부의 유동성 공급 확대 압력에 무언의 시위로 맞서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한 금융 전문가는 “발권력을 가진 한은이 정부로부터 ‘돈 풀어라’ ‘금리 내려라’ 등 이런 저런 지시를 받는 것도 그렇고 검토 중인 여러 안을 정부가 압박하면서 한은이 늑장 대응하는 것처럼 오해되고 있는 부분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디플레이션으로 인한 것인데 한가하게 ‘물가안정’ 타령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돈이 시장에서 돌지 않는 ‘돈맥경화’와 소비가 얼어가는 실물지표를 분석한 뒤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했다. 일각에선 “한은이 물가안정을 고려하지 않고 돈을 무작정 풀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모두 자구책 없이 한은의 ‘입’만 보고 있는 상황에서 유동성을 확대하면 1차적으로 물가가 오를 것으로 판단한 것” 등의 의견도 있었다. 한편 이헌재 전 기획재정부장관은 최근 서울대 강연에서 한은이 정부와 손잡고 적극 대응하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전 장관은 "한은과 정부 간 정책공조 체제와 채널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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