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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위기 심각 … 경기 침체 2년 이상 갈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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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8일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글로벌 금융위기의 시사와 교훈’이란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강연을 수락한) 내가 너무 성급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말 실수를 할까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 내 스타일이 아니지만 원고를 적어 왔다”고도 했다. 경제 불안 속에서 그에게 쏠린 시선이 짐짓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28일 이헌재 전 부총리의 강연이 열린 서울대 국제대학원 소강당은 200여 개 좌석이 모두 차 계단까지 사람이 앉았다. 취재진으로 북적거렸고 서울대뿐 아니라 다른 대학 교수들과 국회의원도 보였다. ‘잠행하던’ 이 전 부총리를 무대로 끌어낸 사람은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다. 그는 내년 설립되는 서울대 금융경제연구원의 원장을 맡았다. 미국에 있는 그는 글로 대신한 인사말에서 “아직 연구원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대응책 마련이 시급해 강연회부터 연다”고 밝혔다.

이 전 부총리는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내 회초리를 들었다. 구체적인 정책 방향도 제시했다. 그는 “금융위원장과 금융감독원장은 한 사람이 맡아야 한다”며 “평상시에는 견제가 필요할지 몰라도 위기 때는 걸림돌이 된다”고 말했다. 또 “지금은 한가한 얘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후배 경제관료들과 정치권에 대한 충고였다. 중국 고전 ‘한비자’에 나오는 ‘복잡한 시대에 일이 적은 시절의 수단을 쓰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준비가 아니다(處多事之時 用寡事之器 非智者備也)’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공직을 다시 맡을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내년이 더 어렵다”=그는 “내년이 올해보다 더 어렵고, 현재와 같은 상황이 적어도 2년 이상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글로벌 위기가 없었더라도 국내 불안요인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자체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농담하듯 스포츠 스타의 출현과 위기의 강도를 연관지었지만 말속에 뼈가 있었다. “외환위기 때 박세리 선수가 있어 위기를 극복했다. 몇 달 전 김연아 선수가 피겨스케이팅 우승을 해서 이번에도 문제가 잘 해결되나 싶었다. 그런데 그걸로 부족하더라. 신지애 선수까지 최근 미국 골프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지금이 외환위기보다 더 힘들다는 얘기다.”

그는“외환위기 때는 몇 개 대기업의 문제였지만 지금은 중소기업과 가계가 어렵다. 숫자가 늘었기 때문에 신속하고 단호한 처리가 쉽지 않다. 또 외환위기 때는 금융시장이 아예 붕괴했기 때문에 답도 간단했다. 지금은 붕괴는 아닌데 작동하지 않고 있어 더 어렵다”고 말했다.

미국 책임론도 제기했다. 이 전 부총리는 “미국은 1년6개월간 문제를 방치했다”며 “어차피 미국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보니 명분 쌓기용으로 시간을 끌었다는 시각도 있다”고 비판했다.

◆“초기 진화 못한 숭례문 화재 떠올라”=현 정부에 대한 쓴소리도 했다. 이 전 부총리는 “옛날처럼 대통령이 명령하면 통하는 시장이 아니다”라며 “대출이 부진한 원인을 찾아서 그에 맞는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책을 실기하면 바로 파국으로 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그는 “(지금 하는 것을 보니) 초기 진화에 실패한 숭례문 화재의 참상이 재현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든다”며 “초기 대응을 제대로 못하면 훨씬 큰 비용을 치르게 된다”고 말했다.

국내 금융(금융위)과 국제 금융(기획재정부)의 통합 운영도 주문했다. 하지만 ‘현 경제팀이 잘하느냐 못 하느냐’에 대해선 직답을 피했다. 그는 “분명한 것은 지금 정부 내에, 정부 밖에, 학계에 유능한 사람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이라며 “일할 분위기가 주어지면 이 정도의 문제를 처리하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경제부총리 부활에 대해선 “부총리가 있고 없고는 지엽적인 문제다. 공조 여부가 더 중요하다”고 답했다.

희망적인 말도 남겼다. 그는 ▶외환위기 때보다 국제 협조가 잘되고 있고 ▶세계 금융시장 재편이 한국 금융사에 기회가 될 수 있고 ▶중국 경제가 잘 버티고 있으며 ▶산업·기업은행 같은 정부가 활용할 수 있는 금융기관이 많다는 점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라고 평가했다.

김영훈 기자

◆이헌재(64)=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뒤 행정고시 6회로 공직사회에 발을 디뎠다. 외환위기 때인 1998년 초대 금융감독위원장을 맡아 기업과 금융의 구조조정을 주도했다. 2000년 1~8월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냈고, 2004년 2월~2005년 3월에 다시 재경부 장관 겸 부총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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