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조 백일장 11월] “빈 뜰 거닐다 추억속의 그리움 담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장원 김숙향 올해 시조백일장 마지막 월장원으로 뽑힌 김숙향(43·사진)씨의 고향은 월출산이 자리한 전라남도 영암군이다. 슈퍼마켓이랄 것도 없는, 작은 점방 하나 있는 면 단위 마을에서 노부모는 여직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김씨가 고향을 떠나 서울살이를 시작한지는 10년이 넘었다. 5남매가 아웅다웅 북적이며 크던 시골집은 이제 예전의 정취를 풍기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혼자 살던 노인들마저 치매에 걸려 병원에 가기도 하고, 자식을 따라 외지로 나가기도 했다. 주인 없이 빈 집이 한 집 걸러 하나씩이다.

“처음 고향을 떠나왔을 땐 가고 싶어 안달이 나곤 했는데, 지금은 고향에 가면 되려 너무나 쓸쓸해져요.”

초봄이나 여름은 덜 하다. 어디 가나 쓸쓸한 맛이 있는 늦가을엔 더 심하다.

“옛날이 좋았죠. 집집마다 식구들도 많았고…. 작은 동네지만 제법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어요. 다시는 그런 시절이 못 오겠죠.”

정지용 시인이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고향’)라 노래했듯, 고향이란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빈 뜰을 거닐다 보면 추억이 떠오르죠. 지난 시간도, 사람들도…. 누군가, 무언가가 그리워지는 느낌을 담았어요.”

김씨가 그 기억 속 고향에 대한 상념을 시조로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은 삶에 여백이 찾아왔기에 가능했다. 10년 넘게 미용사로, 한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로 바삐 살아왔다. 시에 관심이 있었어도 습작을 할 시간조차 없었다. 쉬고 싶었다. 마흔 언저리에 방송통신대 국문학과에 입학해 최근 졸업했다. 3~4년간 중앙일보에 연재되는 시조백일장을 유심히 지켜봤다. 백일장 지면이 시조 교본이었다. 1년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습작을 시작했다. 그렇게 몇 편 모인 작품으로 백일장에 응모했다. 그는 “이렇게 덜컥 월장원이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당선자는 연말장원전에 응모할 수 있다. 12월 초까지 새로운 작품을 써내 연말 장원을 겨룬다. 촉박한 시간 안에 새 작품을 써내야 하는 11월 당선자는 이 경쟁에서 가장 불리하다.

“열심히 써서 도전해야죠.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얻었으니 앞으로도 계속 써야 마땅하겠죠.”

이경희 기자



■ 이달의 심사평
가을 뜰의 정경 소회 차분하게 그려

 어느 새 올해의 마지막 백일장이다. 일년 동안 열심히 시조를 쓰며 고민해온 모든 응모자께 감사와 위로를 드리고 싶다. 그러면서 먼 길을 위하여 신발 끈을 다시 매시길 당부한다. 또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지금 이곳에 대한 시조를 거듭 주문한다.


장원에 김숙향 씨의 ‘빈 뜰에서’를 뽑는다. 저물어가는 가을 뜰의 정경을 묘사하며 소회를 차분하게 앉힌 작품이다. 특히 ‘사뭇 지친 그리움’으로 은유한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빈 뜰’의 서성거림을 ‘누군가 올 것만 같아 발그레한 저녁놀’로 번지게 한 대목이 빛난다. 그 덕분에 쓸쓸한 가을밤도 ‘저 멀리 따스한 빛 온기처럼 흐르는 밤’이 되고, ‘빈 처마 거미줄은 어둠 속에 고요한데’ 같은 섬세한 감각도 살아난다. 하지만 셋째 수 종장처럼 첫 구와 둘째 구의 의미가 이어지는 것(‘유년의 그 별/살며시’로 읽힘)은 신경을 더 써야 한다.


차상에 오른 모정희 씨의 ‘소행성 B612에 보내는 편지’는 신선함이 돋보인다. 어린 왕자를 처음 만난 ‘스물일곱’ 때의 추억과 ‘마흔넷’에 다시 읽은 느낌의 간극을 그리고 있다. ‘못다 쓴 일기장을 소혹성에 부’치던 시절은 누구나 지녔을 법하지만, ‘은하에 길을 내고 건너’는 것처럼 지금의 일상과는 먼 꿈의 궤적이다. 이렇게 읽어도 제목이나 발상의 참신성을 내용이 담아내지 못 하는 점을 고민하기 바란다.

차하 강선애 씨의 ‘단풍’은 비유 능력을 평가받았다. 특히 첫 수 초장에서 단풍을 ‘실핏줄 터져 나와/바람에 우는 소리’로 읽는 것은 놀랍다. 그리고 ‘길 잃은 구름 한 조각/노을 속에 빠졌다’도 단풍과는 어울리는 종장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후에 자주 노정하는 감상과 상투적 표현들이 작품을 전반적으로 떨어뜨리니, 이 점을 유념하기 바란다.

요즘 문예지마다 시조 지면이 늘거나 신설되고 있다. 시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 덕분인 듯하다. 이렇듯 창작과 향유가 넓어질수록 시조의 미래도 풍요로워질 것이다. 또 전통에 대한 이런 자긍이 한국미학의 현재화나 세계화에도 기여하리라 믿는다.

심사위원 : 시조시인 정수자·권갑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