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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속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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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지난해 4월 프랑스 알스톰사가 제작한 고속열차 TGV는 파리~스트라스부르 사이를 총알처럼 달렸다. 순간 최대 속도는 시속으로 574.8㎞에 이르렀다. 경쟁관계인 독일의 ICE나 일본 신칸센 기록을 멀찌감치 따돌린 것이다. 2003년 일본에서는 열차가 시속 581㎞로 달린 기록이 있으나 당시에는 자기부상 방식이었다. 물론 평상시 TGV는 시속 300㎞ 남짓으로 운행한다.

영국에서 제작된 ‘아카비온 GTBO’라는 차는 올 2월 최고시속 547㎞까지 달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자동차 자리에 올랐다. 공기역학적으로 디자인된 덕분에 정지 상태에서 불과 30초 만에 시속 480㎞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물론 실제 도로에서는 이런 속도로 달릴 수도 없고, 가격도 30억원이나 돼 일반인들이 넘보기도 어렵다.

비행기 가운데 SR-71 블랙버드 정찰기의 음속 3.3의 속도는 시속으로 4000㎞가 넘고, 퇴역한 초음속 여객기 콩고드의 마하 2.23 속도는 시속으로 2700㎞나 된다.

21세기는 ‘속도의 시대’다. 칭기즈칸의 기마군, 나치 독일의 롬멜 전차군단이 보여주듯 속도는 힘이다. 속도를 높이면 더 먼 곳까지 갈 수 있고,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속도는 성장을 부추기고, 성장이 다시 속도를 내도록 재촉한다. 어떤 이들은 ‘속도 바이러스’를 얘기한다. 현대사회의 빠른 속도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사람은 도태되고 소외될 수밖에 없다며 비판한다.

속도가 커지면 자연과 자원에 대한 우리의 요구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 오늘날 인류가 일년 동안 소모하는 에너지의 양은 거의 100만 년 동안 축적된 화석연료의 양에 해당한다. 석유·석탄 같은 화석연료의 과소비는 지구온난화로 이어지고 있다.

25일 최대시속 350㎞의 한국형 고속열차 KTX-Ⅱ가 개발돼 첫 출고됐다. 한국은 세계 네 번째로 시속 300㎞대의 고속열차를 제작·운영할 수 있는 국가가 됐다. 때맞춰 코레일에서도 시속 300㎞로 운전하도록 돼 있는 KTX의 최고 운행 속도를 시속 305㎞로 올리기로 했단다. 속도를 5㎞ 높이면 제 시간에 도착할 수도 있고, 승객이 타고 내리는 데도 다소 여유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숨 한 번 쉴 때 300m씩 내닫는 고속열차에서는 여유롭게 창 밖 경치를 즐길 수 있는 ‘느림의 아름다움’이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강찬수 환경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