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이제는 산업이다] 4. 붕어빵 진료 이제 그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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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등 각종 건보 규제가 진료서비스의 질을 하향 평준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진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직원들이 병원의 진료비 신청 내역을 심사하는 모습. [최정동 기자]

지난해 8월 韓모(44.여)씨는 서울 S대학병원에서 내시경(복강경)으로 담낭 절제수술을 받았다. 배를 가르지 않는 수술법이다. 13일간 입원했고, 총진료비는 489만원이 나왔다. 韓씨는 300만원을 냈다.

이 중에는 내시경 수술에만 사용되는 특수 재료비 150만원이 포함돼 있다. 내시경의 통로 역할을 하는 트로카(4개, 개당 15만원)를 포함해 여섯 가지의 재료값이다.

하지만 이 병원이 韓씨에게 재료비를 부담시킨 것은 불법이다. 현행 건강보험은 수술 행위료(44만4000원)만 인정할 뿐 재료비를 별도로 물리지 못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배(수술비)보다 배꼽(재료비)이 훨씬 큰 데도 건보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현재 복강경을 치료하는 데 쓰는 재료와 같이 사용 제한이 걸린 품목은 660개나 된다.

이 때문에 일부 병원은 돈을 안 받거나 소액만 받는 대신 일회용 재료인 트로카 등을 두세 번 활용한다. 이 경우 날이 무뎌져 살 속으로 잘 들어가지 않아 환자가 더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이 병원 관계자는 "소독한다고 하지만 감염 위험 때문에 불안하다"고 말했다.

병원은 환자를 진료하고도 왜 '잠재적 범죄자'가 되고 마는 것일까.

건강보험법은 모든 병원이 반드시 건강보험에서 인정하는 진료만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에 따른 것이다. 정해진 범위를 벗어나는 진료는 할 수 없고 그럴 경우 건강보험법 위반으로 처벌된다.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든 제도다.

세계종합법무법인 황덕남(전 청와대 법무비서관)변호사는 "당연지정제로 인해 환자들은 획일적인 진료를 받기 때문에 의료의 질이 하향 평준화된다"고 말했다.

보험 대상이 되는 진료.약품 등을 획일적으로 정해 운영하는 것도 문제다.

예치과 관리회사인 메디파트너 남대식 부사장은 "돈을 부담하더라도 더 나은 재료와 약을 사용해 30분 이상 충분한 서비스를 받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쉬운 얘기지만 지금의 제도로는 불가능하다. 1분 진료나 30분 진료나 진찰료가 똑같기 때문이다. 국립암센터 박은철 과장은 "미국처럼 진찰료를 다섯 단계로 나눠 오래 진찰할수록 비용을 많이 인정하면 검진이 충실해져 초기에 큰 병을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병원별 진료 수준의 차이도 무시되고 있다. 감염 방지용 1인실 등 최고급 시설을 갖춘 서울아산병원의 중환자실과 법정 장비를 70%밖에 갖추지 않은 서울 K대학병원의 하루 입원료가 8만2670원으로 똑같다.

가톨릭의대 김춘추 교수는 "새 치료술에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순간 10% 손해가 난다"고 말했다. 2002년 세계 최초로 골수조직이 절반만 일치하는 수술을 성공시킨 권위자인 金교수도 "새로 기술을 개발할 의욕을 못 느낀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건보가 신기술 개발마저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黃변호사는 "의료기관이 원하면 건보를 취급하지 않도록 계약제로 전환하는 등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성식.정철근.이승녕.권근영 기자, 오병상 런던 특파원, 유권하 베를린 특파원<medic@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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