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프라를세우자>16.천년 古都 경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허물어내리던 반월성의 담과 계림의 처마.개구멍으로 들락거리던 불국사와 남산의 그 많던 석불과 석탑.여름날 소나기를 피하던 안압지의 정자.흙먼지 날리던 황톳길을 따라 낡은 초가 뒤로거대한 젖가슴처럼 군데군데 솟아 있던 봉황대(고분 ).등하교길에 오고가던 논 가운데 제멋대로 던져져 있던 목과 팔이 없는 부처님….' 만화가 이현세씨는 신작.천국의 신화'서문에서 이같이 고향 경주를 표현하고 있다.어린 시절 그의 황톳빛 경주에는이런 낭만이 있었다.그러나 천년 신라의 도읍으로 전성기엔 17만여호까지 옹기종기 다정스럽게 살았던 낙원 경주가 그후 천 년이 지난 지금은.사람 못 살 곳'으로 낙인찍히며 몸살을 앓고 있다. 건물 신축은 커녕 개축.보수도 꿈꿀 수 없고 땅값은 계속 하락,울산.포항등 공장과 함께 돈방석에 오른 인근 도시들의시민들과 비교하면 상대적 박탈감이 극에 달해있다.경주시민들이 족쇄처럼 생각하는 것은 현행 문화재보호법.형평성이 결 여된 법의 모순은 문화재 보호와 발굴에도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보호법은 43조에서 매장문화재 발견시 신고의무를 규정하고 82조에서는 처벌규정을 두고 있다.44조에서는 임의발굴 불가를 못박고 경비마저 시행자부담임을 천명하고 있다.
또다른 장애요인은 예산부족.경주 전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문화재를 발굴하고 복원하려면 사유재산권 보상이 우선돼야 하지만 정부의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
김유신이 술취한 자신을 기녀 천관의 집으로 이끈 말의 목을 베었다는 전설의 천관사지(天官寺址)2천5백여평은 안내판만 서있는 가운데 사유 농경지로 방치돼 있다.
이처럼 그동안 법과 예산부족으로 참고 지냈던 경주시민들의 개발욕구가 지방자치제가 시작되면서 표출되기 시작했다.
최근 이들에게 찾아온 경부고속철도 경주역사.경주경마장등의 개발소식은.우리도 이제 좀 살 수 있게 됐다'는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다.그러나 이같은 개발계획은 문화유산 보호와의 상충속에 주춤거리며 경주 보존과 개발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 토 필요성까지 대두됐다.
당초 형산강노선으로 계획을 세웠던 고속철도도 막대한 문화재훼손이 우려돼 화천리노선과 화천역이 대안으로 대두되고 있지만 아직도 노선과 역사 지정을 둘러싼 이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5월 경주시의회를 통과한 황성공원부지 시청사 건립계획도 숲과 문화재훼손 문제로 덮어둔 상태다.
그렇다면 문화유산보호와 개발욕구는 영원히 풀지못할 모순적 과제인가.로마.파리.런던등 문화재가 밀집한 도시들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 막대한 관광수입까지 올리고 있는지 연구대상이 아닐수 없다.
전체적인 재검토를 토대로 외국의 경우처럼 경주등 고도(古都)에 대한 보존특별법이 제정돼야 한다는 지적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97문화유산의 해'집행위원회 한병삼(韓炳三)위원장은“그동안 예산상의 문제로 미뤄왔던 고도보존법에 대한 윤곽을 올해안으로 확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와함께 환경영향평가제처럼 도시개발.국토종합개발에 문화영향평가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경주 인근에 신도시를 개발해 도심주민의 이주를 유도한 뒤 국가차원에서 전반적인 발굴을 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같은 법과 제도 마련 이전에 문화재보호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따라서 고도보존법에 대한 구상은 문화체육부가 나서기보다 건설교통부등 국토개발을 담당하는부처에서 먼저 자각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라는 주 장이다.
경주문화재연구소 신창수(申昌秀)소장은“모순이 많고 실효성이 떨어진 문화재보호법을 개정하고 예산을 지원하려는 의지가 전국가적 차원에서 공감대를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주에 대한 보존과 개발은 정치적 인기편승이나 근시안적 성과에 급급한 졸속안으로 처리돼서는 안되며 다시 시작되는 또다른 천년을 내다보는 문화정책 속에서 무르익어야 할 것이다.

<곽보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