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정서법’이 부른 무리한 재판 … 국가 신인도만 상처 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뉴스분석 “얻은 것은 없고 상처만 남았다.”

외환은행 헐값 매각 재판을 두고 양수길 국가경영전략연구원장이 한 말이다. 이 사건이 남긴 상처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양 원장은 “이번 사건으로 한국의 대외 신인도가 훼손된 게 가장 큰 상처”라고 말했다. 헐값 매각 시비와 뒤이은 법정 공방은 해외 투자자들에게 ‘한국은 정부 스스로 결정한 일을 번복하는 나라’로 비춰지게 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부는 외국인 투자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겠다고 외쳤다. 하지만 외국인들은 정부의 홍보보다는 헐값 매각 재판을 더 유심히 지켜봤다. 홍콩 주재의 한 헤지펀드 매니저는 1심 판결이 나기 전 “정부가 승인한 외환은행 매각이 형사소송으로 이어지는 것을 본 외국인들이 한국에 투자할 의욕이 생기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복잡한 법률 논쟁을 떠나 크게 보면 사건은 의외로 간단하다. 미국 자본이 들어와 외환은행을 사들여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젠 그 돈을 챙겨 나가려고 한다, ‘먹튀’다, 배가 아프다, 털면 뭔가 있을 것 같다…. 노무현 정부 시절 불어닥친 이런 정서를 배경으로 정치권과 시민단체들이 움직이고, 감사원과 검찰이 의혹 캐기에 나섰다. 특히 2004년 10월 최경환 한나라당 의원이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된 의혹설을 제기하면서 한나라당은 ‘론스타 게이트 진상조사단’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금융을 아는 사람들은 정부의 정책적 판단을 사법적으로 재단하는 데 거부감을 보여 왔다. 고위 관료 출신의 한 금융계 인사는 “중간에 멈췄어야 했는데 누구도 제동을 걸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이번 사건은 관료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 공무원들 사이엔 ‘책임질 일은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좋다’는 의식이 퍼졌다. “소신보다는 보신”이라는 자조적인 말도 나왔다. 소위 ‘변양호 신드롬’이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외환은행 매각의 열쇠를 쥐고 있던 금융위원회도 이런 비난에서 자유롭지 않다. 금융위는 올 초 출범 후 내내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외환은행을 사겠다는 영국 HSBC의 대주주 자격심사를 미뤘다. HSBC의 자격심사와 이 재판의 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다 금융위기로 9월 중순 HSBC가 발을 빼자 금융위는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정부가 신속한 결정을 하지 못해 실기한 측면이 있다”는 질책을 받았다.

이런 면피의식은 최근 금융위기 대응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구조조정이나 금융시장 대책을 마련하면서 확실하게 총대를 메고 나서는 곳이 없다. 옛 금융감독위원회 간부 출신의 금융인은 “10년 전 이헌재 금감위원장의 리더십이 지금 다시 거론되고 있는 것은 정부의 권한이 약해져서가 아니라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분위기 탓이 크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후유증이 적지 않을 전망이다. 한 법조계 인사는 “정부가 승인 심사를 지연해 외환은행 매각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론스타가 우리 정부를 상대로 거액의 소송을 제기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금융위 고위 간부는 “심사 도중에 당사자들이 계약을 파기했으므로 정부가 소송에서 질 확률은 낮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홍기택 중앙대 교수는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안 했기 때문에 론스타의 소송 제기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라며 “가뜩이나 좋지 않은 대외 신인도가 더 나빠질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국민정서법’이 부른 무리한 송사가 한국 경제 곳곳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다.

김준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