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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은영의 DVD세상] 가슴 아리다, 양조위 눈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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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면

씨클로 (Cyclo)
감독 : 트란 안 홍
주연 : 르 반 록, 양조위, 트란 누 옌케
화면비 : 애너모픽 와이드 스크린 1.78:1
사운드 : 돌비 디지털 2.0 상영시간 : 129분
자막 : 한국어, 영어 제작사 : 드림믹스
영화 ★★★☆ 화질 ★★★ 음질 ★★★

고장 난 전등이 깜빡깜빡 점멸하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술과 약에 취해 고통스럽게 바닥을 뒹굴던 소년은 자신의 몸에 파란 페인트를 칠하기 시작한다. 얼굴 가득 두텁게 말라붙는 페인트. 깜빡깜빡 사라져 가는 전등처럼 죽은 금붕어를 입에 문 소년의 의식도 아득히 멀어져 간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베트남 출신 감독 트란 안 홍의 두번째 장편 '씨클로'는 이렇듯 인상적인 이미지로 가득하다. 데뷔작으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던 상복 많은 감독답게 베니스 영화제 최고의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던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씨클로'를 끄는 18세 소년과 그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다.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씨클로를 모는 소년. 일종의 '베트남식 택시'인 씨클로는 소년과 가족에게는 목숨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씨클로를 불량배에게 도둑맞는다. 절망에 빠진 소년은 깡패들과 손이 닿아 있는 마님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렇듯 영화는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을 연상시키며 시작한다. 하지만 소년이 씨클로를 잃고 범죄에 빠져들면서 영화는 점점 절망과 고통으로 가득한 그의 내면을 초현실주의적으로 담아간다.

소년이 범죄에 빠져드는 바로 그 순간 소년의 누나 역시 매춘과 절망적인 사랑이 뒤섞인 타락의 길로 접어든다.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두 개의 방안에서 각각 범죄와 매춘에 빠지는 두 사람, 하지만 둘은 서로를 깨닫지 못한다.

두 사람을 잇는 존재는 시인이다. 조직의 우두머리이자 마님의 정부이며 시인인 그는 누나를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매춘을 알선하는 것도, 소년을 범죄의 길로 이끄는 것도 그다. 범죄를 저지른 후 오물 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소년은 어항의 물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오물을 씻어낸다. 시인은 누나를 위해 열매의 껍질을 벗긴다. 순결할 정도로 하얀 열매의 속살은 하지만 곧 시인의 피로 붉게 변한다. 마치 시인에 의해 순결한 누나가 더럽혀질 것을 암시하듯 말이다.

사실 DVD의 화질과 사운드는 그다지 좋지 못하다. 서플리먼트도 제작진 소개, 예고편 정도로 소박하다. 하지만 지금 DVD로 '씨클로'를 다시 만나는 것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옛 기억을 되살리는 듯한 색다름 감흥을 전해준다.

이 영화는 가장 처참한 현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희망을 꿈꾸게 하는 영화라는 평가와 베트남 출신 프랑스 감독이 서구의 시선에서 베트남의 현실을 '이미지'로 이용했다는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1995년 당시 국내에 예술영화의 붐이 막 일기 시작하던 무렵 이 영화를 알았던 관객에게는 이 DVD는 새삼 반갑기 그지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여성 관객들은 표정 없는 얼굴로 한없는 고통을 표현하던 시인을 연기한 양조위의 촉촉한 눈빛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겠지만 말이다.

모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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