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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으로가는간이역>11.삼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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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붉은 노을 한울에 퍼져/핍박의 설움이 받쳐/보국안민 기치가높이 솟았다/한울북 울리며/흙묻은 팔뚝엔 불거진 핏줄/황토벌판에 모여선 그날(……)저 흰 산 위엔 대나무 숲을 이루고/봉항대엔 달이 비춘다/검은 해가 비로소 빛을 내던 날 /황토현에 횃불이 탄다.” -작자미상.동학농민가'중에서 역사(歷史)를 말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어떤 이들은 역사에는 일정한 형태와 주기가 있다고 한다.역사순환론이다.
크게 보아 결국 같은 일들이 계속 되풀이되는 것,그것이 역사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그들은 역사란 어느 정점을향해 치닫는 무엇,다시말해 끊임없는 진보의 과정이라고 한다.
다만 그 정점,혹은 끝이 신이 내려준 천국인가,아니면 사람이만든 파라다이스인가에 따라 종교와 .과학'으로 갈릴 뿐이다.
어쨌든 자신의 역사를,특히 쓰디 쓰게 피멍든 역사를 잊지 않을 것.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교훈을 찾으려 노력할것.이것이 역사와 관련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명제일 것이다. 삼례역(參禮驛)으로 간다.이 겨울,차가운 겨울바람 하나 등에 업고 전북완주군삼례읍으로 간다.마음은 답답하다.그리고 한없이 무겁다.
삼례로 가는 기차 안에서 생각한다.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시간은 긴 역사 속에서 어떤 부분인가를.
그리고 그 안에서 무엇을 해야하는가를.만약 역사가 되풀이되는것이라면 삼례의 황톳빛 땅이 그 해답을 줄 것이다.
서울역에서 기차로 3시간반.간이역 순례의 목록에 오르긴 했지만 삼례역은 작은 역이 아니다.
4명씩 조를 이룬 역무원들이 온종일 바삐 움직이는 곳.한산한간이역은 아니다.
하지만 삼례역을 두고.간이'역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그런 외형때문은 아니다.
보국안민(保國安民)의 기치,척왜구민(斥倭救民)의 깃발,제폭구민(除暴救民)의 함성.그 높이 솟은 역사로 인해 삼례역은 크게기억된다.
1894년 갑오년 10월.전라도에서 가장 큰 역참(驛站:조선시대 주요 교통통신기관)이 있던 이곳 삼례에 수만명의 동학농민군이 재집결한다.
그해 6월 전주화약 이후 남도 곳곳에 집강소가 설치되고 백성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폐정개혁(弊政改革)의 새 세상을 경험한지반년이 채 안됐을 때였다.
위기를 느낀 썩은 위정자들이 외세,청과 일본을 끌어들이고 이에 분기한 전봉준 이하 농민군이 다시 일어서 한데 모인 곳이 바로 삼례다.
그 2년전인 1892년 겨울,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탄원하기위해 수천의 동학교도들이 최초로 한데 모인 곳도 이곳 삼례였다. 이제 동학농민군의 자취는 지난해에야 건립한 비석 하나로 남아있을 뿐,다른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삼례역 앞에는 드넓게 펼쳐진 호남평야.해질녘 겨울의 호남평야는 고요하다.
1백년전 그날 저 들녘을 가득 메웠을 수많은 깃발과 함성.그것들이 희미한 기억처럼,아니면 낯익은 광경처럼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역사를 말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지금 우리가 그렇듯 우리 후손들도 그럴 것이다.
다만 한가지,언젠가 우리 후손들이 부끄러운 이야기 속에 우리를 담아 말하지는 않게 해야한다고,삼례의 동학혁명기념비 앞에 서서 다짐할 뿐이다.
〈삼례=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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