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다시 보는 '주말의 명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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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섹시한 남자 배우들이 무대를 휘어잡지 않아도 흥행할 수 있을까. 20·30대 여성 관객이 주를 이루는 뮤지컬 시장에서 이채로운 대형 작품이 연말 공연가에 등장했다. 동명의 뮤지컬 영화로 잘 알려진 ‘지붕 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이 그것.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들이하라’는 슬로건 그대로 가족 동반 공연을 표방하며 21일 라이선스 초연의 막을 올렸다.

1900년대 초반 러시아 우크라이나 지방의 작은 유대인 마을 아바테브카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은 마치 ‘주말의 명화’를 보는 듯 아늑하고 따사롭다. 장성한 다섯 딸을 제 마음대로 어쩌지 못하면서 아내 골데와 티격태격하는 가장 테비에는 한국의 아버지와 꼭 닮은 모습이다. 각자의 로맨스에 빠져 부모와 반목하지만 결국 화해하는 딸들의 모습은 객석의 한국 여성들에게도 쉽게 공감될 듯하다. 이렇듯 보편적 가족애에 호소하면서도 유대인 전통을 세세하게 살린 연출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무대 가장자리를 울긋불긋 장식한 낙엽 소품이나 천장까지 닿을 듯한 메마른 노목은 마치 남산 자락이 무대 안까지 이어지는 느낌이다. 뒤쪽에 별다른 세트를 하지 않고 텅 빈 공간에 조명을 자유자재로 쓰면서 계절과 시간의 변화를 주는 것도 인상적인 활용. 특히 둘째 딸 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 간 남편을 좇아 떠나는 장면이나 마을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엔딩 신은 노을 속에 걸어가는 실루엣이 처연하게 와 닿는다.

2004년 브로드웨이 리바이벌 버전을 옮겨온 무대에선 따로 오케스트라 피트가 없이 단원들이 무대 오른쪽을 차지한 채 연주한다. 오케스트라는 결혼식 장면에선 흥겨운 연주팀이 되기도 하고, 꿈 속 판타지를 더해 주는 등장인물이 되기도 한다. 테마곡 ‘선라이즈 선셋(Sunrise, Sunset)’을 비롯해 주요 뮤지컬 넘버는 모두 의역돼 불리는데, 멜로디가 친숙한지라 귀에 쏙쏙 와 닿는다. 특히 러시아어로 축복을 뜻하는 ‘마즐토프’가 반복되는 ‘Tevye’s Dream’과 ‘Wedding Dance’는 절로 후렴구를 흥얼거리게 된다.

아슬아슬하게 지붕 위에서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를 억척스러운 아바테브카 사람들에 비유하는 대사에서 엿보이듯, 작품은 그저 따사로운 부성애 얘기만은 아니다. 1900년대 러시아 유대인들이 혹독한 탄압 속에 강제 이주를 당한 역사가 배경에 드리운다.

러시아계 연출자 구스타보 자작의 조부모도 당시 아르헨티나로 이주해야 했다. 2004년 브로드웨이 공연 당시 협력연출을 맡았던 자작은 “한국의 불행한 근대사가 작품 속 테비에 가족이나 나의 경험과 비슷한 게 있다”며 “한국 관객들이 풍부한 감성으로 이해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책임감 강하고 전통을 중시하는 아버지 테비에는 뮤지컬 무대에 처음 도전하는 탤런트 노주현과 중후한 저음이 매력적인 배우 김진태가 열연한다.

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
12월 28일(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평일 오후 8시, 주말·공휴일 오후 3시,
7시30분(12/10, 12/17, 12/24 수 오후 4시 공연 있음)
문의 1588-7890, 02-501-7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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