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인재·지혜 모으는 포용력에 필요하면 채찍 드는 강단 갖춰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중앙SUNDAY
한 외국계 제조업체의 수출 담당자는 지난달 하순 지식경제부 고위 간부로부터 “수출 물량을 앞당겨 내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다음달 초 내보낼 물량이라도 통관 절차만 미리 밟으면 수출 실적으로 집계할 수 있으니 서류부터 내달라는 것이었다. 이 담당자는 “이런 전화를 받아 본 게 7~8년 만인 것 같다”며 “무역수지가 환율 등 경영환경을 안정시키는 데 큰 변수가 되기 때문에 편법이긴 하지만 협조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수출 독려와 유가 하락에 따른 수입대금 감소로 10월 무역수지는 12억 달러 흑자로 돌아섰다. 하지만 이는 반짝 효과에 그칠 전망이다. 이달 20일까지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14.3% 감소했다. 수출이 감소세로 돌아선 것은 6년5개월 만이다. 특히 이 기간 무역적자(42억여 달러)가 지난달 같은 기간의 1.5배를 기록, 2개월 연속 흑자를 장담하기도 어렵게 됐다. 내년 전망도 밝지 않다. 기획재정부는 최근 내년 무역수지 전망을 12억 달러 흑자에서 56억 달러 적자로 수정했다.

실적 악화와 금융경색 이중고

내수도 꽁꽁 얼어붙었다. 대형 할인점의 지난달 매출은 지난해 10월보다 12% 줄었다. 지난해 10월에 있었던 추석이 올해 9월로 앞당겨진 것으로만 설명하기엔 감소 폭이 너무 컸다. 대표적 내구 소비재인 자동차 내수 판매도 올 들어 10월까지 0.9% 감소했다. 하반기 이후 판매량이 급속히 줄어 업체마다 비상 대책을 세우고 있다. GM대우에 이어 쌍용차도 다음달 일시적으로 전 공장의 가동을 중단키로 했다. 르노삼성도 감산이나 인력 감축을 검토 중이다.

자동차업체뿐만 아니라 대부분 기업은 죽을 맛이다. 10월 부도업체는 321개로 전달보다 118개 늘었다. 2005년 3월 이후 최대치다. 10월까지 문을 닫은 건설업체(327개)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7.3% 늘었다. 주로 대기업인 570개 상장사의 3분기 영업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7%, 순이익은 59% 줄어들었다.
 
선제적 대응 나서야

실적 부진과 금융경색으로 돈 가뭄에 허덕이거나 쓰러지는 기업이 크게 늘고 있다.

정부와 은행이 ‘대주단 협약’ 등으로 구조조정 돛을 올리려고 하지만 선장은 잘 보이지 않는다. 선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밀려오는 쓰나미를 걱정만 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지휘했던 이헌재 전 재정경제부 장관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이유다.

‘용병 소방수’로 불린 이 전 장관은 외환위기 직후 금융감독위원장을 맡아 맨손으로 시작했다. 인재를 모집해 조직을 만들고 불길을 잡은 뒤 부서진 건물을 다시 세웠다. 필요하면 금융기관과 기업을 설득하면서 저항을 무릅쓰고 칼을 휘둘렀다. 술이라도 한잔 마시면 “이런 일을 하면서 욕을 안 먹을 수 있느냐”고 큰소리를 쳤다. 훗날의 청문회나 법정 얘기가 나오면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직원들에게는 몸가짐을 세심히 가르쳤다.

당시는 구조조정 기술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어 배우면서 적용하는 시대였다. 이 전 장관 스스로 민관연구소와 컨설팅 업체, 그리고 전문가를 수시로 만나 구조조정을 공부했다. 교과서적 처방을 넘어 현실을 냉정히 분석하고 정치적·사회적 장애물까지 뛰어넘을 수 있는 방안을 찾아냈다.

당시 금감위는 구조조정의 밑그림을 그리고 굴지의 대기업과 맞짱을 떠야 했던 빅딜 같은 굵직한 현안을 상대했다. 이 전 장관 스스로 대기업이나 은행과의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았다. 반도체 빅딜 때는 LG그룹을 여신회수 카드로 압박했다. 그룹 회장을 만나 담판을 짓기도 했다. 금감위의 위장 계열사인 기업구조조정위의 오호근 위원장은 사자처럼 버티고 있었고, 이성규 국장은 치밀하고 정교했다. 정밀 수술이 이들의 몫이었다. 두 사람은 이헌재 위원장이 공들여 기용했다. 그들은 몸을 던져 일했고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워크아웃을 잡음 없이 처리했다. 워크아웃이 마무리된 뒤 오 위원장은 폐암으로 작고했고 이 국장 역시 위암 수술을 받았다. 금감위에서 이헌재 전 장관을 보좌했던 최흥식 연세대 교수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병마를 불러들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구조조정은 나라와 시장을 구해야 한다는 각오, 지혜와 인재를 모으는 포용력, 그리고 몸을 던져 협곡을 넘는 용기가 빚어낸 합작품인 셈이다.
 
“은행 기업개선팀도 재정비해야”

지금은 어떤가. 각계에 구조조정 기술자들이 널려 있다. 10년 구조조정의 경험과 노하우도 있다. 기업 사정 역시 그때보다 낫다. 폭풍을 헤쳐갈 선장과 항해사가 제자리를 잡고 있지 못할 뿐이다. 경제연구소장을 역임한 A씨는 “대통령은 은행 대출을 독려할 게 아니라 채찍을 들고 자본을 투입할 수 있는 강단 있는 인물과 정교한 기술자를 기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행을 지원하기 위해 야당의 협조를 받아서라도 공적자금 10조원 정도를 마련해 뒀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시간을 끌수록 구조조정 비용은 늘어난다. 선제적 구조조정은 자원 낭비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 구조조정 컨설턴트 김모씨는 “각 은행의 기업개선팀을 신속히 재정비하고 정부 소유의 산업·우리·기업은행이 주도적으로 새로운 워크아웃을 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민간·시장 주도 방식으로 추진하더라도 기획재정부·한국은행·금융위원회·공정거래위원회의 직접적이고 과감한 지원이 수반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허귀식·나현철 기자 tigerace@joongang.co.kr

중앙SUNDAY 구독신청

[J-Hot]

▶ 68만원짜리 양복 5만원에…의류업체들 '눈물의 세일'

▶ BMW 7시리즈, 주행중 갑자기 비 쏟아지면…

▶ [칼럼] 얼떨한 구조조정 대신 물타기로 시간벌자?

▶ 연말 할인 차 살 때 꼭 따져봐야 할 것들!

▶ 정의선 사장, 쏘울 직접 몰며 "내 사랑~"

▶ 운동장→연병장, 아파트 경비실→위병소라 하는 女국회의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