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Review] 내 세 가지 행복은 책·채소밭·차 한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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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
법정 지음, 문학의 숲, 246쪽, 1만1500원

깨달음은 무아(無我)의 명상 속에서만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벗하며 일상을 즐기는 삶에서 홀연 얻어지기도 한다.

스님은 어느 해 봄, 고랭지에 핀 선연한 빛깔의 작약에 매혹돼 100그루를 사다 심었다. 그런데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웬 ‘검은 손’이 그걸 죄다 캐가고 말았단다. 아하, 산골 움막까지 훑고 간 그 매정한 인심은 무어란 말인가. 그런데 그때 모조리 뽑힌 작약에서 떨어져 남은 이삭이 몇 년 뒤 거짓말같이 움을 틔워 꽃을 피웠단다. “기특하고 고맙다.”

법정(76) 스님이 『홀로 사는 즐거움』 이후 4년 반 만에 새로 산문집을 엮었다. 지난해 가을 건강을 해쳐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병원 신세를 지기도 한 그다. “흔히 이 육신이 내 몸인 줄 알고 지내는데 병이 들어 앓게 되면 내 몸이 아님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내 몸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병상에서 깨닫는 진리다. 내 몸이 내 뜻 너머에 있을 뿐 아니라, 내 벗들의 염려와 함께 내 몸은 그들에 연결돼 있다. “앓을 때는 병자 혼자서만 앓는 것이 아니라 친지들도 친분의 농도만큼 함께 앓는다.”

병마의 흔적을 떠올리는 독자라면 ‘아름다운 마무리’란 책의 제목이 문득 눈에 밟힐 수도 있겠다. 스님은 말한다. “머지 않아 늦가을 서릿바람에 저토록 무성한 나뭇잎들도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 빈 가지에 때가 오면 또다시 새 잎이 돋아날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57편의 수필 한 편 한 편에 스님이 17년째 이어 온 강원도 산골 살림의 소박한 내음이 배여 있다. “내 삶을 이루는 소박한 행복 세 가지는 스승이자 벗인 책 몇 권, 나의 일손을 기다리는 채소밭, 그리고 오두막 옆 개울물 길어다 마시는 차 한 잔이다.”

삶이 팍팍하다. 온갖 경제 지수가 하강 곡선을 그리며 삶을 포박하려 할 때, 그 숫자와 그래프는 잊고 이전에 내가 가꾼 나만의 삶의 지수는 어디로 가고 있었나를 한번쯤 생각해 보자. 스님이 말한 것처럼 ‘아름다운 마무리’,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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