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읽기>외식업체 TGI프라이데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집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은 나는 음식에 관한 한 주부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며칠 집에서 아침.점심.저녁을 먹고 있으면 매일 그냥 그런 음식을 먹는다는 사실이 갑자기 지겹게 느껴진다.
내가 그럴 즈음에야 아내는 더하다.매일 방구석에 틀 어박혀 책을 읽거나 컴퓨터만 두드리고 있는 나에게 때마다 밥을 차려주는일은 그것을 먹는 일보다 더 지겹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외식을 하자,여기까지는 금세 의기투합이 된다.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여기가 어려운 대목이다.
먼저,무슨 음식을 먹을 것인가.며칠 전 신문에서 어디 가면 맛있는 무엇이 있다는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이런 기사는 신문더미에서 다시 찾으려 해도 잘 찾아지지 않는다.새로운 정보가 없는 셈이다.별수없이 예전에 먹어본 음식중 맛 났던 것을 다시 먹을 수밖에 없다.몇몇 음식점이 후보로 떠오른다.하지만 음식점까지의 거리를 고려해야 하고 교통편도 생각해야 한다.아이를 데리고 가려면 될 수 있는 한 자가용을 이용하는게 편하지만주차문제도 생각해야 한다.생각해야 할 게 많은 셈이다.게다가 아내와 나,딸간에 취향과 판단이 서로 대립하고,예산 제약이 머리 한구석에서 이 모든 논의에 무거운 추를 달아준다.이쯤 되면외식은 이미 즐겁기만 한 일이 못되기 시작한다.
이야기가 지겨워질 즈음,딸이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아빠,프라이데이(Friday)에 가요.” 딸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나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딸의 생일에 어디를 가서 외식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미국에서 유학한 친구의 전화가 걸려와 그의 권고로 TGI 프라이데이에 간 적이 있다.케이크를 사들고 들어간 우리에게 TGI 프라이데이는 딸의 의자에 풍선을 걸어주고 머리에는 종이 모자를 씌워주었다.음식이 나올 때까지 심심치 않게 딸에게 그림 그릴 종이와 크레용도 주었다.종업원들이 와서 생일축하 노래를 합창했고,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즉석 사진을 찍어주었다 .
그때 딸의“야,내 생일을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 주는구나”하는흥겨운 표정이 오늘 이런 제안을 낳았을 것이다.아내와 내가 딸의 제안에 동의한 것은 딸의 입장에 대한 배려만은 아니었다.차를 몰아야 하는 나에게는 주차문제가 해결되고 평 소.외식은 집에서 해먹기 어려운 음식이 좋다'는 지론을 가진 아내의 에그조티시즘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마침 금요일이라선지 TGI 프라이데이는 대기해야 할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다.잠시후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시켰다.그리고 음식을 기다리며 생각해 보았다.왜 이렇게 장사가 잘되는 걸까.주차장.비흡연석의 설치,어린이에 대한 배려….이런 요소들이라면 패밀리 레스토랑을 표방한 많은 음식점들이 있다.음식만 해도 그렇다.물론 피자집들처럼 메뉴가 제한되지 않아서 좋기는 하지만 파스타.파히타.피자.버펄로 윙 따위가 TGI 프라이데이의 전유물인 것도 아니다.미국유 학이나 연수 또는 근무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장소로는 TGI 프라이데이가 독점적인 것은 아니다.
***왜 이렇게 장사가 잘될까 언뜻 TGI프라이데이의 인기 시발점에는 미국 유학이나 연수 또는 근무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향수.취미 또는 구별짓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부터 미국 유학 갔다온 친구의 권유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으니 말이다.입맛 만큼이나 .악독한' 자본도 없다는 부르디외의 말도 생각났다.갈비나 등심이 아니라 텐더 로인을 먹는다는 것,자장면이나기스면 대신 체이주안 파스타를 먹을 때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은그저 라이프 스타일,또는 .폼'이 아닐까.
아내에게 이런 내 생각을 얘기하며 의견을 묻자 아주 당연한 듯 대답한다.“분위기가 좋잖아.조명도 인테리어도 좋고.” 심드렁한 대답에 실망한 표정을 짓자 아내는 좀더 자세해진다.“가령말이야.다른데하고 비교하면 말이야,우선 그런데는 너무 환해.마치 형광등 조명 비슷해서 각 테이블에 독립성을 주지 않거든.담배 피우는 내 친구들은 그렇게 밝은데서 만나는 것을 아주 싫어해.둘러봐.여긴 전체적으로 호둣빛 나무로 내장을 하고 붉은색.
초록색 조명과 부분조명을 적절히 써 전체적인 톤에 통일성을 주는 동시에 테이블간의 독립성도 만들어내거든.” 고개를 끄덕이며경청하는 나에게 아내는 약간 신이 난듯 이야기를 이어간다.
“공간 배치도 적절해.매장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우선 여기만 생각해봐.사각형의 공간이 있고,옆으로 벽감 형태이긴 하지만 널찍한 공간을 한쪽에 배치했지.그쪽은 단체 손님이나 외진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장소인 것같아.사각 공간은 외곽에 둘러가면서 비흡연석을 두고,안쪽으로 흡연석을 배치했지.가운데는 바가 있어.대체로 술을 마시고 끽연하는 곳이지.봐,그 부분은 한 단계가 높아.약간 피라미드 형태지.이런 모양이 내 생각에는 여기가 다른 곳처럼 이름만 흡 연.비흡연을 갈라놓은 것이 아니고 실제로 비흡연석으로 흡연석 연기가 흘러들지 않도록 해주는 것같아.음악도 그래.신경 써서 고르는 것같아.컨트리 송아니면 밝은 톤의 재즈들이 흥청거리는 기분을 자아내잖아?” 언제 그렇게 꼼꼼히 살폈느냐는 나의 말에 아내는“기본이지 뭐.대부분의 소비자들이 나 정도는 고려하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우리는 접시를 비워나갔다.다 먹고 나자 포만감에 나는 담배 한대 생각이 간절했다.아내는 딸애를 먹이고 있을테니,바에 가서 칵테일이나 한잔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고 오라고 했다.바에 앉아피나콜라다를 마시며 담배를 길게 빨았다.
피나콜라다 맛이 괜찮아 바텐더 아가씨에게 칵테일을 학원에서 배웠느냐고 물었다.“아니요.회사에서 직접 연수과정을 밟았죠.학원보다 훨씬 더 철저히 가르쳐요.1년동안 배웠어요.”파트타임으로 일하냐고 물었다.“아뇨.여긴 파트타임을 연말연 시 바쁠 때아니면 안써요.바텐더나 웨이터 모두 상시고용이에요.” 몇시간 일하냐고 했더니“주 45시간이에요.여기 괜찮아요.휴일도 확실하고,이 계통중엔 임금도 제일 나아요.일하는게 즐거운 편이에요.
그래서 손님들한테 친절하려고 해요.그 걸 회사에서 강조하기도 하고요.” ***안정고용이 바로 경쟁력 아가씨와 이야기하며 나는 TGI 프라이데이의 경쟁력의 원천을 알 것 같았다.아내가 말한 것들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들이었다.하지만 그러면 무엇하랴,종업원들이 접시를 던진다면.노동관계법을 날치기 통과시킨 사람들을 불러다 TGI 프라 이데이를 견학시키고 싶었다.파견근로자나 변형근로시간.정리해고제가 아니라 이런 확고한 고용이,종업원에 대한 교육투자가,그리고 높은 임금이 경쟁력을 낳고 있다는것을. 그러나 계산을 마치고 나와 차에 올라타면서 나는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짐을 느꼈다.분명 잘 먹었고,TGI프라이데이가 외국회사라는 데서 오는 반감도 바텐더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라졌는데도 말이다.집에 다 와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알 수있었다.그 아가씨의 가슴에 달려있던 명찰이 두개였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작은 글씨여서 볼 수 없었지만(아마 그녀의 본명이었을 것이다),왼편 가슴의 것은 크고 선명했다.거기엔 .Jenny'라고 씌어있었다.
김종엽〈문화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