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김영삼.김대중 단일후보 실패 책임 攻防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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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중앙일보 신년인터뷰를 통해 87년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후보단일화 실패 책임을 둘러싸고 쌍방의 논란이 벌어졌다.또 대선예비주자들의 과거경력 시비도 일고 있다.
김대중총재는 당시 양김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경위에 대해“YS가 당내경선을 거부했다”고 주장했다.그는“(단일화하지 못한)책임이 둘이 똑같다고 하면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항변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신한국당 최형우(崔炯佑)고문은 인터뷰에서“역사에 양심을 걸고 얘기해도 단일후보 탄생은 김대중선생이 흩뜨렸다”고반박했다.그는“당시 DJ는 부산.경남에 YS 나오고,대구.경북에 노태우(盧泰愚) 나오고,충청도에 JP가 나오 면 자기가 재야와 서울표를 합해 이긴다고 판단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통일민주당의원으로 후보단일화투쟁을 주도했던 김정길(金正吉)전의원은“분열의 책임은 양김에게 똑같다”는 평가를 내놓았다.그는“처음에는 DJ가 당내경선을 요구했고 내가 YS에게 이를받자고 건의하기도 했으나 YS는.군부의 DJ불가 론'등을 들어이를 거부한 게 사실”이라고 기억했다.그는“그해 양김의 10월결별직전 YS가 최종적으로 경선을 수락했으나 이번에는 이미 딴살림의 결심을 굳힌 DJ가 뿌리쳤다”고 회고했다.
이 부분에 있어 박찬종(朴燦鍾)고문은“단일화 실패에 항의하는뜻으로 나는 삭발을 했으며 그후 8년간의 낭인생활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朴고문의 경우 자신이 강조하는 것만큼 단일화 투쟁을 처음부터 이끈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정도 동참 한 것은 인정된다고 金전의원은 평했다.
이한동(李漢東)고문은 85년 학원안정법 파동때 민정당 사무총장이었다.그는 당시 입장을 묻는 질문에“그 법은 당시 허문도(許文道)정무수석에 의해 제안됐고 당정회의에서 許수석만 찬성했다.안기부를 포함해 모두가 반대했다”고 답변했다.그 무렵 李총장바로 밑에서 사무차장을 지냈던 이상재(李相宰)전의원은“당시 청와대의 입김이 워낙 강해 당이 눌려지내긴 했지만 학원안정법에 대해서는 노태우대표.李총장.이종찬(李鍾贊)총무등 고위당직자들의대부분이 무리라고 생각했다”고 李 고문의 증언을 뒷받침했다.
그는“그러나 그런 시국문제에 대해 당직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청와대의 과잉사고를 미리 무력화시키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한편 지난해 연말 안기부법과 노동관계법 날치기처리에 대해 신한국당 예비주자들은 한결같이“아쉽지만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그중 이홍구(李洪九)대표는“후회는 않는다”고 했고 김덕룡의원은“마땅히 갖춰져야할 일이 야당의 실력행사로 저지 되는 상황을 방치한다면 이는 집권당의 직무유기”라고 말했다.
이회창(李會昌)고문은“바람직하진 않지만 소수가 민주주의 의사결정을 방해하면 다수결의 원칙이 실현될 수 없는 것”이라고 했고 최형우고문은“여야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공동책임론을 내세웠다. <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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