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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평등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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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를 맞아 국제 금융체제 붕괴가 인류에게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현재의 위기가 대공황에 버금가는 재난을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공황의 경험은 현재의 위기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먼저 정부는 경제위기 때 경제적 지원뿐 아니라 사회적 지원도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경기 침체는 사회적 약자에게 더 큰 피해를 줘 삶을 힘겹게 한다. 실제 대공황 때 가난한 사람은 일자리를 잃고 먹을 것이 부족해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1948년 제정된 유엔 인권선언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국제사회와 각국 정부가 인권을 기본적으로 보장해야 할 의무로 규정했다. 이 선언은 인권의 천부인권적 속성을 규정하고 이를 국제사회의 규범으로 정립했으나 구체적인 법적 뒷받침이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지난달 44개국 128명의 인권·평등 전문가들은 유엔 인권선언을 기반으로 구체적인 인류 평등권 선언(‘평등 원칙 선언’)을 제정했다. 금융위기를 맞아 빈부·인종·성별·종교의 차이를 뛰어넘어 기본적 인권으로 평등권의 법적 원리를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다. 이 선언은 전문가들이 합의한 27개 원칙을 기반으로 한다. 이 원칙들은 영국 평등권트러스트(ERT)가 주도한 1년 이상의 논의 이후 나온 결론이다.

평등은 시대에 따라 뜻이 달라지며, 동시대에도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평등의 원칙이 무엇이냐는 사회적·문화적·정치적 현실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다. ‘평등 원칙 선언’ 제정자들은 먼저 인종이나 성별, 성적 취향으로 인한 위협이 평등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불법이라는 데 동의했다.

물론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민권운동 옹호자들은 ‘즉각적 불법’의 위협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지 않으면 이 ‘평등 선언 원칙’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개발도상국의 인권 전문가들은 빈곤이 불법적 차별의 근거라는 점을 명시하고 싶어 한 반면, 일부에서는 빈곤이란 개념이 너무 모호해 법적 권리와 의무로 규정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또 절대 빈곤은 상대적 빈곤과 다르며, 개인이 교육과 노동을 통해 빈곤에서 벗어나는 데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이들은 최저 임금제나 직업 연수제도 등 특정한 법적 제도가 빈곤을 평등권 위반이라고 모호하게 규정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결국 ‘평등 원칙 선언’은 다양한 논의를 종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모든 이견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평등 원칙 선언’이 우리 시대에 효과적이고, 20세기 후반 미국과 유럽 등에서 채택된 차별 반대 법들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또 각국 정부가 현재의 국제적 의무를 다하면서 평등권의 원칙을 적극 장려하도록 해야 했다.

이 선언은 평등권을 독립적 권리로서 인정했다. 즉 평등권은 교육받을 권리와 같은 다른 법적 권리와 상치되지 않는다. 따라서 주거의 권리나 직업을 가질 권리 같은 다른 법적 권리가 지켜지지 않으면 평등권도 침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평등권은 국내법과 국제법이 규정한 모든 활동 영역에서 존재할 수 있다. 즉 국적을 가진 사람뿐 아니라 난민이나 망명 신청자에게도 적용된다. 각국 정부가 평등권을 실행하고 확대하는 데 적극적 의무를 가져야 한다.

새로운 평등 선언의 필요성은 이 작업을 시작한 1년 전에도 시급했다. 금융위기로 가진 자와 가난한 사람 간의 격차가 더 커지는 것을 막아야 하는 오늘날에는 더욱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다.

로버트 헤플 영국 평등권트러스트 회장
정리=정재홍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