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확보 최우선” 내년 사업계획서 못 짜는 재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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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의 풍향계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가 12일 서울 쉐라톤워커힐 호텔에서 열렸다. 올해 마지막 회장단 모임이라 세간의 관심도 뜨거웠다. 경기침체가 가속되는 가운데 대기업 총수들이 일자리와 투자, 두 가지 초점에 어떤 입장을 드러낼지가 관심사였다.

일부 언론은 “임금을 동결하거나 깎는 대신 사람을 내보내지 않는 ‘일자리 나누기’(job sharing)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뜻을 모을 것”이라는 관측을 내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회의 석상에선 일자리와 관련한 언급이 일절 없어 섣부른 오보가 되고 말았다. 전경련 주변에선 “대기업 회장들이 어려울 때마다 되뇌던 ‘고용 안정’ 덕담조차 꺼내기 힘들 정도로 경제 상황이 어려워졌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시계(視界) 제로=삼성 고위 관계자는 “내년 경제전망이 워낙 불투명해 대부분 계열사가 사업계획서를 만들지 못했다. 11월 중순인데도 그런 경우는 없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환율·금리 등 여러 시장 변수를 설정해 그에 맞는 ‘시나리오’ 경영계획안을 여럿 만들고 있다”고 전했다.

LG전자·LG디스플레이 등 LG 제조 주력사들은 내년도 사업계획을 유연하게 짜놓기로 했다. 전체 예산을 수립한 뒤 월 단위로 다음 달 계획을 보완·수정해 나갈 생각이다. 내년 초반기엔 경제 상황이 매달 크게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이란 예상 때문이다. SK도 삼성과 비슷한 방식을 채택했다. SK 측은 “내년 경제 상황을 몇 단계로 분류해 여러 사업계획서를 짜놓고, 실제 상황에 근접한 계획서를 그때그때 채택하겠다”고 밝혔다.


◆현금이 최고=삼성전자가 지난달 미국 샌디스크 인수 중단을 선언한 것은 현금을 아끼겠다는 뜻이 강하다. LG전자는 독일 코너지그룹과 태양전지 합작법인 설립을 논의하다가 최근 중단했다. 회사 관계자는 “지구촌 금융시장이 불안해져 국제적 합작 논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해외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물색하던 SK텔레콤도 일단 일부 사업에서 발을 빼는 분위기다. 미국 3위 이동통신회사인 스프린트넥스텔을 인수하려던 계획을 최근 포기한 것.

기업들은 돈이 많이 들어가는 신규 사업을 접고 자금 확보에 혈안이 돼 있다. 금호아시아나는 금호생명과 부동산을 팔아 1조원을 조달하겠다는 목표지만 실적을 다 채우지 못했다. 두산 지주회사인 ㈜두산은 사모펀드인 MBK파트너스와 두산테크팩 지분 전량을 4000억원에 매각하는 계약을 했다. 두산인프라코어가 방위산업 부문을 별도 법인으로 분리하는 건 매각을 염두에 뒀다는 해석이 나온다.

◆감산·감원 공포=자동차 업계가 잇따라 감산을 선언했다. GM대우는 다음 달 하순 8일간 국내 전 생산라인을 일시 멈춘다. 현대자동차는 미국 앨라배마 공장 생산량을 줄였다. 하이닉스반도체는 생산성이 떨어지는 일부 라인을 단계적으로 폐쇄하고 있다.

일부 업체들은 유급휴가와 희망퇴직 등을 통해 인건비 절감에도 나서고 있다. 쌍용자동차는 판매 실적이 부진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부문에서 승용차 부문으로 생산인력을 전환 배치하기로 노사가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350명의 인력은 유급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금호타이어는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다. GM대우와 하이닉스반도체는 내년도 신규 인력을 채용하지 않기로 했다. 재계 관계자는 “유급휴가와 신규 채용 축소로 버티지만 앞으로 더 나빠지면 감원 카드를 꺼낼지 모른다”고 전망했다.

이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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