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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역사] 66. 구름을 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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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 1960년대 필자의 모습

비행기가 하얀 구름 위를 날아가다 새파란 바다 위로 나섰다. 현해탄이다. 뭉클 치솟는 감개를 어찌하랴. 그 옛날 연락선을 타고 저 바다를 오가며 그 얼마나 많은 빛깔의 슬픔을 맛보았던가.

이윽고 나타난 일본 열도의 산과 들과 도시. 산에는 나무가 우거졌고, 하얀 도로에는 자동차가 장난감처럼 굴러간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국주의 일본의 모습은 간 데 온 데 없는 것 같다.

이윽고 하네다 비행장에 내렸다. 번영한 나라의 냄새가 확확 가슴에 와닿는다. 어디를 어떻게 왔는지 도심 한복판의 커다란 호텔에 도착했다. 도쿄 프린스호텔이다. 조그만 섬나라의 인상은 어디로 갔는가. 모든 것이 큼지막하고 널찍하다.

마쓰야마 젠조 부부가 왔다. 놀랐다. 그의 부인은 일제 때 우리의 애인이라고 하던 명배우 '다카미네 히테코'가 아닌가.

"불편한 것 있거든 말씀하세요. 돈이 필요하거든 말씀하세요."

여기가 어디인가. 내가 와본 적 있는 일본 땅인가. 융단 폭격으로 잿더미가 돼버렸던 땅 위에 이렇게 휘황찬란한 문명 국가를 세운 일본인의 저력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초청한 '문예춘추'의 이케지마 신페이 사장을 찾아갔다. 자기도 졸병으로 군대에 갔다왔다면서 '현해탄은 알고 있다'에 대해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그가 직원 식당으로 안내해 차례대로 밥쟁반을 들고 받아 먹었다. 그는 "문예춘추는 시나리오를 실은 적이 없는데 한선생 작품은 실을 용의가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것은 절호의 기회였는데 영화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시나리오는 김기영 감독이 자기 취향대로 고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새로 각색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저녁에는 일본 최고의 빌딩이라는 '가스미가세키'로 갔다. 가지야마 도시유키의 초청이었다. 어리둥절했다.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다시 한번 꿈이 아닌가 했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날 행사다. 도쿄 프린스호텔 2층 커다란 홀을 꽉 채운 일본 문인들의 모임. 이진섭과 나를 환영하는 파티가 열렸다. 많은 남녀 작가와 인사를 나눴다. 일본은 그 어느 나라보다 작가를 존경하는 경향이 있다. 잘 쓰고 못 쓰고는 그 다음이다. 우리는 극진한 대접을 받은 것이다. 인사말에서 나는 학병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23년 만의 재회입니다. 일본이 이렇게도 변할 수 있는가.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평화, 그것이 좋습니다. 군국주의 시대의 네모 반듯한 인간상은 무서웠어요. 어제 거리에 나갔더니 파출소 순경이 엉성한 차림새로 얼빠진 눈을 하고 있더군요. 아! 이게 바로 평화로구나 했어요"라고 했다. 사람들은 웃었다.

"조센징이란 말 아직도 쓰고 계시나요? 조센징도 달라졌습니다. 피차 어디로 이사할 수도 없는 형편이니 이웃끼리 싸우지 말고 좋은 시대를 열어 보십시다. 일본은 세계에 대해 자랑스러운 얼굴을 할 자격이 있습니다. 동서문화 융합에 가장 성공한 나라이니까요. 군국주의 시대로 돌아가지만 마세요. 존경받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날 밤 고미카와 준페이가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인간의 조건'을 써 일본 열도를 열광케 한 최고의 인기작가였다. 영광이었다.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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