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神은 인생을 배웠고, 야구는 김성근을 얻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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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호 16면

한 달에 한 번 집에
김성근은 6~7개월 이어지는 시즌 동안 한 달에 한 번꼴로 집에 온다. “아침에 눈 뜨면 ‘여기가 어디지’하며 놀라. 가족과 함께 있으면 어색할 때가 많지. 허허허.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야. 40~50대에는 두세 달 만에 한 번씩 들르곤 했으니까.”

11번의 해고, 1000번의 승리

김성근의 24시, 365일은 야구로 채워져 있다. 인천 숙소에서 주로 지내는 그는 기상과 동시에 12시간 후 경기 라인업을 짠다. 오전엔 메이저리그를 보고, 식사 후엔 운동을 한다. 선수들이 운동장에 나오면 야구를 가르치고 잔소리를 한다. 격전이 끝나면 야간훈련을 지휘한다. 녹화 중계를 보고 새벽에야 잠든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자 “메이저리그는 중단되는 거야?”라고 되물었던 그다.

그는 야구의 장인(匠人)이다. “세상에 야구가 없었으면 날 뭘 했을지 몰라. 야구에서 인생을 배우고, 다시 인생에서 야구를 배웠지.”

김성근의 야구 인생은 서른 살도 되기 전 왼쪽 어깨 부상으로 투수 생명이 끊기면서 다시 시작됐다. 기업은행 소속이었던 그는 은퇴 후 은행원이 될 수도 있었지만 서투른 한국말 때문에 스스로 창구에 앉기를 포기했다. 무엇보다 야구를 계속하고 싶었다.

김성근 감독은 실패가 아닌 시행착오가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했다. 작은 사진은 부인 오효순씨(오른쪽)와 자택 정원에서.

김성근은 “어깨가 아파 말년엔 1루수로 뛰었다. 마운드에서와는 다른 야구가 보이더라. 작전이 보이고, 확률과 통계가 보였다. 그리고 지도자가 돼도 할 일이 많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기업은행을 나와 1969년 마산상고 감독에 부임했고, 70년대에는 충암고와 신일고 지휘봉을 잡았다. 4강에 들고, 우승을 했지만 그에겐 적이 많았다. ‘반쪽발이’ 소리도 자주 들었다. “특히 내겐 편 들어줄 사람도 없었지. 대신 야구로 꼭 이겨 주겠다고 다짐했어.”

김성근은 고집불통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진심으로 대했고, 뜻이 맞지 않으면 함께 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김성근을 독하고, 모질고, 괴팍하다고 얘기한다.
 
69세까지 계약 연장
아마추어에서 여섯 번, 프로에서 다섯 번이나 잘린 김성근은 야구는 물론 프로스포츠를 통틀어 현역 최고령 감독이다. 게다가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SK를 2년 연속 챔피언으로 이끌어 만 69세까지 계약을 연장했다. 시대는 그를 미워하면서도, 또 필요로 했다. 야구밖에 몰랐던 탓에 실패한 김성근이 야구밖에 몰랐던 덕분에 이제야 빛을 보고 있다.

김성근은 82년 OB 코치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84년 OB 감독에 올라 3~4위를 반복하다 88년 5위에 그치자 해임됐다. 이듬해 최약체 태평양 감독을 맡아 3, 5위를 기록한 채 물러났다. 91년부터 삼성 지휘봉을 잡았지만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해 재계약에 실패했다. 96년부터 신생팀 쌍방울 사령탑에 올라 꼴찌의 반란을 일으키다가 99년 중도 퇴진했다. 2001년 하위권이던 LG의 감독대행을 맡아 2002년엔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 수완을 발휘했지만 준우승을 하고도 잘렸다.

김성근은 재능이 부족한 선수, 늙거나 어린 선수들을 장악하고 개조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하위 팀을 4강으로 이끄는 데 그만한 감독이 없었다. 특히 태평양과 쌍방울은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질기고 강했다. 그러나 재일교포라는 신분과 어눌한 한국말, 학맥·인맥은 물론 최소한의 정치력도 없는 그에게 세상은 늘 엄격했다. ‘우승은 못하는 4강 감독’이라는 낙인은 지난해 우승 트로피를 처음 품기 전까지 24년이나 따라다녔다.

그러나 승리에 목마른 팀은 또 김성근을 찾았다. 그러면서 ‘일본식 야구’라는 말로 재단됐던 그의 야구는 변화를 거듭하며 발전했다. 선배 감독과 후배 감독, 올해는 외국인 감독의 도전이 있었지만 김성근은 항상 기대 이상의 성적을 냈다.

LG 유니폼을 입고 처음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던 2002년. 필생의 라이벌인 김응용(현 삼성 사장) 삼성 감독이 6차전 접전 끝에 어렵게 김성근을 이기고는 “신과 싸우는 것 같았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때부터 김성근은 ‘야신(野神·야구의 신)’으로 불렸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준우승을 이룬 ‘야신’은 LG 프런트와 마찰 끝에 또 잘렸다. 그의 나이 환갑이었다. 평생을 치열하게 싸워 온 만큼 은퇴를 생각할 때도 됐다. 그러나 그는 2005년 일본 롯데의 부름을 받아 2년간 코치로 일했다. 선진야구를 배우고 경험하고 싶어서였다. 이승엽(요미우리)이, 박찬호(LA 다저스)가 제도권에서 벗어난 김성근을 스승으로 따르기 시작한 시점이다.

전지훈련 때도 책 한 박스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김성근은 약관이던 62년 홀어머니와 형제들을 두고 홀로 한국으로 건너왔다. 김성근은 제법 쓸 만한 왼손 투수였지만 일본 사회인팀에선 몇 년을 허송해야 할지 몰랐다. 60년 재일교포 모국 방문단으로 한국에 처음 왔었던 그는 한국에 뿌리를 내리기로 결심했다.

김성근은 고교 시절 연극반원이었을 만큼 활달했다. 그러나 한국에선 입을 닫았다.

재일교포인 그에게 따뜻하게 말 걸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일과 후 술집에서 한국말을 배웠는데 취객들로부터 말을 배워 40년이 지난 지금도 발음이 서툴다는 농담도 한다.

발음은 부정확하지만 김성근은 달변에 박학이다. 그의 서재에는 500여 권의 책이 꽂혀 있다. 오래된 야구 서적은 물론 축구 서적도 있고 경영·철학 등 인문·사회과학 서적도 많다. 김성근은 두 달 가까운 전지훈련을 갈 때 책 한 박스를 챙긴다. 매일 10시간 동안 지옥훈련을 시킨 뒤 2시간 동안 야간 강좌를 연다. 녹초가 된 선수들은 김성근에게서 야구와 인생에 대해 배우고 또 다음날 강행군을 이겨낸다.

장인들이 대개 그렇듯 그는 야구 외의 인생이 없어 보였다. 자신의 팬이었던 여학생을 아내(오효순씨)로 맞았고, 하나뿐인 아들(김정준 SK 전력분석팀장)에게도 야구를 시켰다. 그러나 그에겐 야구가 인생이고, 인생이 야구이기에 이상할 것이 없다.

김성근은 지금까지도 주류에 편입되지 않았다. 여전히 승리에만 집착하는 야구, 재미없는 야구를 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가 이뤄낸 성과보다 과거의 실패가 더 크게 느껴져서일까. 자분자분 말을 잇던 김성근은 실패란 단어가 나오자 눈에 힘을 줬다.

“난 지금껏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성공하지 못했어도 배우고 느낀 게 있다면 그건 시행착오였지. 실패가 아니라 시행착오가 성공의 어머니야. 물론 난 지금도 시행착오 중이고. 야구는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어. 마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생년월일 1942년 12월 3일 ▶본적 경남 진영 ▶출생 일본 교토 ▶학력 일본 가쓰라고-동아대(중퇴) ▶가족 부인 오효순(63)씨와 1남2녀(아들은 SK 전력분석팀장 김정준씨) ▶경력 1962~1968 기업은행 선수 1969 마산상고 감독 1972 기업은행 감독 1975 아시아선수권 대표팀 코치 준우승(체육훈장 기린장) 1982~1985 프로 코치(OB) 1986~2002 프로 감독(OB-태평양-삼성-쌍방울-LG) 2005~2006 일본 롯데 코치 2007~2008 감독 복귀(SK) 2007~2008년 한국시리즈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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