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짚기>부부교사 생이별의 아픔 누가 알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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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목포에서 배를 달려 6시간30분.축도 5만분의 1 지도에선 점으로도 찾아볼 수 없는 국토 최서남단의 소도(小島)인.가거도'(일명 소흑산도)의 아침은 새벽 안개를 걷으며 힘찬 출항을 알리는 통통배의 엔진소리와 함께 열린다.사위가 채 뚜렷한 형체를 드러내기 전인 오전5시 무렵..자연의 다이얼'에 맞춰 돌아가는 섬마을의 아침은 유난히 빠른 법이다.조금 있으면 산 중턱에 자리잡은 고공석(47)교사의 10평 관사에도 엷은 햇살과 함께 소금기 섞인 바다냄새가 스며든다 .고씨가 어김없이 눈을 뜰 시간이 됐음을 의미한다.
고씨의 공식 직함은 이 섬내 유일한 중학교인.흑산중학교 소흑산분교'체육교사.대도시에선 한반 인원도 못 채울 전교생 28명이제자의 전부다.
올해로 고씨의 섬생활은 4년째다.해남.담양등지에서 18년 교직생활을 보냈던 그는 94년 목포에서 서쪽 방향으로 2시간30분 거리인 하의도에 부임했고 지난 3월에는 이곳 가거도로 정식발령을 받았다.뭍을 떠나본 적이 없던 고씨가 섬 생활 적응을 위해 곳곳에 뿌려야 했던 땀과 고민은 접어두자.어쨌든 그는 지금 목욕탕.이발소 하나 없는 이 생활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10여년 자취생활로 단련된 고교사의 음식솜씨는 수준급이다.찌개와 튀김류는 그가 만들 수 있는 30여종 요리의 말석(末席)에 불과하다.스스로.요리살'이라 부르는 손맛이 그의 자랑. 하지만 그 역시 아내가 차려주는 아침밥이 이 세상에서 가장맛있는,또 초등학교 다니는 막내딸의 재롱을 지상 최고의 즐거움으로 아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다.
그는 전국에 1만쌍이나 존재한다는 별거 부부교사중 한명이다.
“날씨가 추워지니 더욱 가족 품이 그리운데요.” 새해 설계를할 시간 고씨는 가슴속에 묻어둔 소망 하나를 풀어낸다.그 표현을 조심스레 해야 하는 이유는 제자들에게 이곳 생활을 혐오하는것으로 비칠까봐서다.
그의 부인 조인득(42)씨는 광주시 두암중학교에서 미술과목을맡고 있다.해남에서 교편을 잡았던 16년전 당시 교감의 소개로백년의 연을 맺게된 그녀다.하지만 고씨는 상당기간을 부인과 떨어져 살면서 항상 마음속에 미안한 마음을 가져 왔다.특히 93년까지 한시적으로 허용돼 오던 시.도간 교류가 전격 중단된 뒤부턴 더했다.부인 조씨는 광주권내에서만 인사이동이 이뤄졌지만 정작 고씨 본인은 전남도 일대를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했다.처음엔 주말부부,그리고 이젠 월말부부로 ….
사실 고씨가 이번 벽지근무를 자원한 것도.혹시나'하는 기대감때문이었다.지금은 막혀있지만 시간이 지나 시.도간 창구가 다시열리면 그땐 다소 유리한 위치에 서지 않겠느냐는 계산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가끔씩 들려오는 얘기는 온통 부정적인 것들 뿐이었다.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던 친구들이 신규수요가 몰린 경기도 신도시쪽에 대거 옮겨갔다는 소식도 고씨의 귀에 전해졌다.이럴 때마다 .나도 한번' 해봤지만 스스로의 처지를 돌아보며늘 고개를 젓곤 했다.
3남매가 모두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는데다 무엇보다 9대 종손이라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발목을 잡았다.1년에 큰 제사.시제만여섯번이고 여기에다 각종 명절.생일까지 합치면….집성촌인 전남창평에 수시로 들락날락해야 하기 때문에 멀리 떠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고씨가 아내에게 더욱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도 이처럼 맏며느리 역할을 어렵게 하는 그녀를 옆에서 도와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렵게 시간을 낸다 해도 하루 한번밖에 없는 배편은 파고로끊기기 일쑤다.
이런 고씨 부부에게 최근 한가닥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지난해말 KBS 시사프로와의 대담에서 안병영 교육부장관이 부부교사를 함께 근무시키는 획기적인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런 보도에 전국 별거교사들이 일제히 환호했음은 물론이다.그러나 고씨는 이번 발표도 교육부 장관이 바뀔 때마다 정책적으로 내놓았던 공언(空言)이 아닌지 두렵기만 하다.현실의 두꺼운 벽이 장관의 일갈 한번에 해결될 수 있을지도 의문 스럽긴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고씨는 신년엔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같다고 말한다.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술을 줄이고 대신 운동에 열중하게 된 것은 그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어쨌든 그는 만물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는 시간,어김없이 마을뒷산에 올라 섬마을의 아침을 깨우고 있다.

<소흑산도=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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