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신춘중앙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향기와 칼날"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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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함께 살았던 남편으로부터 영원히 도망치기 위해서? 아무튼 내가이 땅에 살고있는 한 남편과의 매듭짓지 못한 인연의 끈은 나를더욱 옥죌 것이다.
“내 칠십평생 자식을 곁에 두고 편안히 바라본 날이 없었다.
젊어서는 남편 얼굴 한번 제대로 못 보고,늙어서는 좀 살 만하니 아들놈이 속을 썩이지,하나 있는 딸년은 아예 이국땅에 건너가 살겠다지,말년에 고독수 끼었다는 사주팔자가 틀리 진 않나보다.” 어머니는 선들바람을 일으키며 등을 돌리고 계단을 내려간다.어긋장나게 휘청거리며 걷는 걸음새가 불안하다.발 밑에 깔린예각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고 있다.당신은 결코 내 고집을 꺾진 못할 것이다.
조금 이른 저녁식사.언제나 그렇듯이 정갈하게 상을 차린 어머니는 그것을 옥상으로 옮긴다.한여름 습관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무더위가 한풀 꺾이는 저녁이 되면,여름내내 우리 식구는 옥상에 상을 차려 저녁을 먹곤 했다.키작은 굴뚝이 서 있는 옥상은 넓고 시원해서 여름철엔 배드민턴을 치거나 그늘진 난간에 기대어 책을 읽기에 좋았다.뜻도 모를 셰익스피어의.소네트'를 암송하며 첫사랑 지리선생님을 생각하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반면에번개가 치고 음울하게 비가 오는 날 에는 피뢰침 아래서 오빠와함께 악마를 부르는 제의를 거행하기도 했었다.그러다가 느릅나무가지가 바람에 부스스 흔들리기라도 하면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도망치듯 옥상을 내려가곤 했다.옥상에서 바라보면 멀리 버스 정류장을 비롯해서 읍 사무소와 지서,그리고 학교가 보인다.논밭을지나 작은 마을까지,보이지 않는 곳이 없다.
밥상을 내려놓은 다음 해야 할 일은 아버지를 부르는 일이다.
어머니는 익숙한 습관처럼.영규 아버지! 영규 아버지!'소리친다.이상한 것은 유난히 귀가 어두운 아버지라도 어머니의 목소리만은 놓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이다.아무리 작은 목소 리라도 귀신처럼 금세 알아차린다.오래도록 서로를 바라보며 살을 부비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몸서리쳐지도록 투명하고 불가해한 일인가.
“많이 먹거라.” 내 밥그릇 뚜껑을 손수 열어주며 아버지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신다.그리고 다시 한말씀.
“미국 가서도 혼자 살 수 있겠냐?” 난데없는 당신의 물음에나는 멈칫 숟가락을 놓는다.
“그럼요.자신있어요.” “여자가 혼자 사는게 쉬운 일이 아니야.” “…….” “훌쩍 떠난다고 해결되는 건 없다.미우나 고우나,여자는 그저 남정네 하나 바라고 살아야 혀.남편은 하늘이야.” 고개를 돌린 어머니는 벌써 눈물바람이다.아버지는 고문을멈추지 않으신다.
“장서방이 병원에 들어가기만 하면 곧 치료가 될게야.테레비에서 보니 알콜중독도 의지만 있으면 회생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더라.그럴 때일수록 네가 옆에 있어야지.인연이란게 그렇게 모질게 끊는다고 끊어지는게 아니다.” 나는 묵묵히 입 속으로 밥을 밀어 넣는다.모래알을 씹는 것 같다.남편이 앓고 있는 건알콜중독보다 더한 병이라고 어쩌면 당신의 딸이 과부가 될 지도모른다고.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한마디도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는 않는다.
거대한 야광충떼가 모여 있는 것 같은 연붉은 황혼이 서쪽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어느밤이었던가,나의 별이 숨을 거둔 그때는.여름철의 별자리는 푸른 거미줄을 씌워놓은 것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웠다.삼각형과 평행사변형의 수많은 도형들이 짝 을 이뤄 하나의 그림퍼즐처럼 신기했다.나는 가장 밝고 환한 별 하나를 찾았다.고모가 끼고 있던 사파이어 반지를 닮은 별이었다.별이 떨어지면 운명이 다한다는 이야기처럼,그 별은 어쩌면 그때 벌써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도 모 른다.그러던 어느날 밤,정류장 하늘 위에 떠있던 나의 별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바보야,그건 별이 아니고 인공위성이란 거야.진짜는 그렇게환한 빛을 내지 않는다구.저렇게 은은하고 슬프게 빛나는 거지.
” 오빠의 속삭임이 귓전을 맴돈다.
아무도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한 장의 네거필름처럼 어두운우리들의 저녁.그리고 나는 어머니를 도와 밥상을 치운다.아버지는 전짓불을 들고 나가신다.양조장 문을 닫을 시간이다.밤늦게 술을 받으러 오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한번 문 을 닫은 아버지는 결코 다시 열어주는 법이 없었다.
“밤중에 먹는 술은 체하는 벱이다.” 그러나 간혹 상가나 잔칫집에서 술을 받으러 올 경우는 달랐다.부조삼아 덤으로 한 통을 더 내주기도 했다.
전짓불을 켜고 여기저기 살피시던 아버지가 문득 옥상 계단에 걸터앉은 나를 올려다본다.
“게서 뭐하냐! 어여 내려와.” 눈부신 전짓불이 내게 쏟아진다.빛 가운데로 하루살이떼가 맴을 돈다.
“내려올 때 조심해라.이젠 너도 나이가 있어.예전에는 훨훨 날아다닌 곳이라도 마음을 놓으면 안돼.” 아버지는 어린 시절 오빠와 내가 양조장의 난간을 타고 놀던 때를 늘.날아다닌다'라고 표현하셨다.건물을 둘러싼 한뼘 나비의 배수구 타기를 두고 오빠와 나는 자주 내기를 하곤 했었다.벽에 바짝 달라붙은 채로위태위태하게 난간을 따라가 다 보면 어느새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에 오곤 했다.그것은 암벽타기같은 긴장과 성취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일이었는데,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마치 거미줄을 타는 스파이더맨 같기도 하다.옆걸음을 치며 달리는 게에도 비유될 수있으리라.내가 벽을 마주보고 겨우 난간타기를 하게 되었을 때,오빠는 벽을 등지고 건널 수 있는 묘기를 부렸다.양팔을 곧게 펴 몸의 중심을 뒤로 향하고 한발 한발 걸음을 옮기는 오빠의 모습은 금방에라도 발을 헛디뎌 떨어져 버릴 듯한 불안감을 늘 안겨 주었다.그러나 오빠는 한번도 실수하지 않았다.아무렇지도 않은 듯 결승점까지 무사히 도착해 유연하게 내려서곤 했다.그 오빠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게임엔 규칙이 있어.절대 아래를 내려다봐선 안 된다는 거야.하늘을 향해,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걸어가야 해.발을 디딜 땐 호흡을 멈추지 마.긴장을 하거나 무서운 생각이 들면 떨어지는 거야.거기서 널 구해 줄 사람은 없으니까 한 가운데쯤 가선 몸을 움직일 수 없어도 걸어야 해.끝이 바로 옆에 있다고생각하면 돼.아주 간단하지?” ***그 오빠가 청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말했다.
“사내가 사내다운 일을 해야지,문학은 또 무슨……군대에 가 별을 다는게 더 낫다.” 오빠는 군대에서 평생을 썩어 지내느니차라리 가업인 양조장을 이어받겠다고 했다.그러나 그건 어림없는일이었다.
“이제 곡주를 마시던 시대는 갔어.네가 배 곯는 것을 조상님들께서도 원치 않을 게야.” 그 이후로 오빠는 다시 집을 찾지않았다.십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소령 계급장까지 달긴 달았지만 한 번도 진급축하연에 자진해서 부모를 초청한 적도 없었다.
남편은 그런 우리 집을 두고 모래알 집안이라는 표현을 썼다.그가 술을 마시 고 이유없는 주정을 시작할 때면 예외없이 그렇게처가를 모욕하곤 했다.
“술장사 하는 집안에서 배운 게 뭐가 있겠어.근본도 모르는 오래비에게서 배운 거라곤 쌈닭처럼 대드는 것밖에 없지,남들처럼자식을 쑥쑥 낳기를 해,생긴 게 반반하길 해.하많은 놈 상대하다 보니 자궁이 말라 비틀어졌는지 알게 뭐야!” 결혼한 이후 그의 주량은 날로 늘어가기만 했고 작년부터는 한번도 술을 마시지 않고 들어온 날이 없을 만큼 알콜 중독 증세가 심해져 갔다.문제는 술 뿐만이 아니었다.언제부터인지 그는 술에 만취된 다음이면 집안의 물건들을 하나씩 집어 던지곤 했다.그것이 값비싼카메라건 비디오건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고 부숴뜨렸다.하루는 더이상 던질 물건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는지 내게로 시선을 옮겨 터무니없는 폭행을 시작했다.발로 걷어차고 어깨를 비틀고 비명을 지르는데도 구타를 멈추지 않았다.그때 남편이 내뱉은 말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처음부터 난 알고 있었단 말야.네가 처녀가 아니라는 걸.첫날밤,깨끗했던 이부자리도 불임도 모두 다 이상했어! 첫애를 지우는 여자를 의심하지 않았던 게 내 잘못이지.” 그러나 나는 결백했다.첫아이를 지운 것은 초음파 검사를 했을 때 애가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뒤집혀 있었고,정상아가 아니었다는 걸 알았기때문이다.오개월이 넘은 상태에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위험한 수술을 감행했다.첫날밤,그래 첫날밤 의 일은 나도 알 수 없다.
처녀막이 터지지 않았다는 것이 내게도 큰 상처였다.산부인과 의사는 중학교 때부터 자전거 통학을 했던 까닭에 그런 일이 생겼을 거라는 모호한 대답이었다.어떤 여자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처녀막이 터지지 않았다고 해서 처녀가 아니라고 우기는 원시인이 요즘에도 있느냐고.그러나 원시인 남편에게 통할 수 있는 변명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미호가 나를 찾은 건 그 무렵이었다.그녀는 미술대학 동창생이었다.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해 미국 어디에선가 살고 있다는 소식만 바람결에 들었다.친하진 않았지만 무언가 통하는 데가 있는 친구였다.남편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며칠간을 앓아 누워 있을 때였다.자포자기에 빠져 술을 마시고 취한 눈으로 깊은 수렁의 어둠을 응시하고 있을 때,그녀로부터 구세주 같은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미국에 일자리가 있어.그곳에서 일을 하며 그림을 그려봐.생활은 걱정하지 말구.남편과는 헤어졌어.그 친구는 푸른눈의 금발이 행복하게 해주겠다고,하찮은 동양여자와 사는 것보다몇배나 더 살맛나게 해준다고……그래서 그 여잘 따라갔 지.난 지금 혼자야.슈퍼에 다녀온 사이 아이도 데리고 가버렸어.사는게온통 지옥이야.너라도 건너와 함께 살았으면…….” 미호는 미국인이었다.영주권도 갖고 있어서 일단 오기만 하면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겠다고 했다.
푸른 호수가 있고 그림같은 집과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이 있는 나라.며칠만 있으면 난 그곳으로 떠난다.물고기처럼 유유히 활주로를 미끄러져 비상하는 새처럼 사뿐히 이 땅을 뜨게 될 것이다. 나는 계단위에 앉아 먼 마을을 바라본다.커다란 당솔나무가 보이는 남쪽 산자락의 묘지기 딸이 살던 집도 보인다.성례라는 이름의 아이였는데,장마철만 되면 결석을 하곤 하였다.그애네집 앞에는 폭이 넓은 개울이 있었다.큰비가 오면 금방 물이 넘쳐 홍수가 나는 개울이었다.초등학교 6학년때 성례는 개울을 건너다 여동생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한참이나 지난 하류의 논두렁에서 시신을 건져냈는데,여자아이의 입에는 작은 붕어 한마리가 물려있었다고 한다.그 일이 있고 나서 성 례는 절대 생선을 먹지 않았다.묘지기집의 불빛이 희미하다.언젠가 성례의 손에 이끌려 그 집엘 간 적이 있었다.언덕위 콩밭에서는 바다가 보인다는말을 듣고 하교길에 선뜻 그애를 따라나선 것이다.그러나 나는 지평선 끝 어디에서도 바다를 찾지 못했었다.
서른 다섯.나는 어느새 눈 앞의 바다도 직접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는 그런 나이가 되어버렸다.
아침을 먹고 일찌감치 집에 전화를 건다.남편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전화를 받는다.구청에 가서 서류 정리를 했느냐고 물으니의외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몸이 좋지 않아서 며칠동안 한 발짝도 움직이질 못했어.” 남편은 말을 잇지 못하고 얼버무린다.나는 단호하게 말한다. “본인이 직접 가야 해요.호적 정리를 하는 거니까.” “알았어.근데 정말로,몸이 좋지 않아서…….” 나는 약해지려는마음을 추스른다.미망인은 되지 말자.며칠간에 걸쳐 내린 결론이다.이혼녀로 평생을 살지언정 남편을 먼저 보낸 과부가 되기는 싫었다.시어머니는 자신의 외아들을 그 모양으로 만든 건 사나운내 사주 때문이라고 했다.여자 가 잘못 들어오면 집안이 망하는법이라고.삼대독자인 아들의 자식 하나 낳지 못하는 내가 씨없는사주를 타고 나서라고.남편과 이혼을 결심하고 시댁에 전화를 걸었을 때 시어머니의 태도는 냉혹했다.어차피 잘못 꿰맞춘 단추이니 제자리를 찾 아가는 건 당연하다.어려운 결심을 해서 장하다고.그러나 남편이 죽고 난 다음 그녀는 알 것이다.당신 자식의목숨을 그나마 지금껏 지탱시켜준 사주가 내게서 비롯되었던 것임을. 전화를 끊고 돌아선 나는 양조장 이곳저곳을 하릴 없이 둘러본다.먼 곳에서 시간이 지나면 까마득히 잊혀질 지도 모르는 고향집.가슴 속에 한 잔 가득 부어 넣고픈 모든 기억의 유적들.덧없는 시간들 위에 허방을 짚은 듯 발걸음이 휘청거 린다.
일층에는 사무실과 커다란 술탱크가 있는 제조실이 있고 안쪽으로 커다란 시멘트 건조대가 있는 건조실과 입국실,사입실,검사실,보일러실,실험실 등이 있다.이떤 용도로 쓰이는 방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두컴컴한 검사실을 들어가면 학교 과 학실에서나 볼 수 있는 실험도구들이 널려 있고,그 방과 연결된 사입실을 들어가면 어른 키보다 높은 항아리들이 수십개.항아리 속에는 발효가 되어가는 술들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내며 익어가고 있었는데,나는 그 항아리 틈에서 어릴 적 커다란 물통을 놓고 목욕을 하곤 했었다.어머니는 술익는 소리가 듣기 좋다고 했지만,깊은 밤,때를 밀어주고 나간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을 때 검은 정적 속에서 들리는 물방울 소리는 귀신을 부르는 요령처럼 무섭기만 했다.건조대를 중심으로 서너 평의 방들이 모여있는 공장에는수십마리의 쥐들이 살고 있었다.그래서 가끔 나는 쥐들이 내 온몸을 갉아먹는 꿈을 꾸기도 했었다.하나같이 술에 취한 쥐들이거나 술독에서 갓 나와 비틀거리는 쥐들이었다.그들은 매번 내 단잠 속으로 기어들어와 동화같은 꿈을 들쑤셔놓고 쏜살갈이 달아나곤 했다.
***수 십개의 항아리를 지나 작은 문을 밀고 나오면 거기엔커다란 우물이 하나 있다.가뭄이 들어도 절대 마르는 법이 없는그 우물은 반경이 이미터쯤이나 되었다.돌을 던지면 한참을 기다려야 소리가 난다.언젠가 나는 손전등으로 칠흑같은 우물 속을 비춰본 적이 있는데,푸르죽죽한 물이끼로 싸인 검은 원구 안은 금방에라도 내 어깨를 붙잡고 빨아들일 것처럼 무시무시했다.어린시절,.푸른 수염'이 그 우물 속에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우물 저 밑바닥에 이끼 대신 그의 긴 수염이 춤을 추고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집을 떠나서도 나는 간혹 웅숭깊은 술잔을 보면 그 우물생각이 나곤 했다.그런 상상은 술을 마시지 않아도 때때로 어지러운 취기를 불러 오는 힘이 있었다.
우물 앞으로는 발효된 술을 걸러 회전시키는 커다란 술탱크가 있었다.그곳을 지나 여과가 된 술들은 호스를 타고 또다른 저장탱크로 옮겨진다.밖과 연결된 탱크에서 아버지는 호스를 뽑아 들통에 술을 담았다.
간혹 사무실이 비거나 사람이 없을 때를 대비해서 우리 식구들은 모두 호스를 내려 통에 술을 담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언젠가 아주 오래전,사춘기 때였다.나와 연적이었던 한 여자애가 술을 받으러 왔다.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사무실도 텅 비어 있었으므로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아이에게 술을 따라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기가 너희 집이야?” 검지손가락을 들어 집 안을 가리키는 계집아이의 눈에는 가득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그래,우리집이다.왜?” “술장사 하는 건 첨 알았는데…….
” 술장사라는 말에 나는 비위가 상했지만 빨리 술을 줘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주전자를 냉큼 가로챘다.
탱크에 걸린 무거운 호스를 빼내 주전자에 대고 조심스럽게 호스의 입구를 놓는 순간 사방으로 하얀 물줄기가 폭발하듯 뿜어져나왔다.연적은 물론 나까지 흠뻑 젖어 나동그라지고,호스에서는 콸콸 폭포처럼 계속 술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온통 술바다였다.행인지 불행인지 그후 아버지는 내게 일절 술따르는 일을 시키지 않으셨다.학교에서는 그날의 일이 발단이 되어 내게 .술공주'라는 새로운 별명이 붙고 말았다.중학교에 입학해서도 그 저주스러운 별명은 귀신처럼 나를 늘 따라다녔다.그리고 어느날 국어수업 도중 .양공주'라는 말이 선생님의 입에서튀어나오자 그 즉시 .술공주'는 .양공주'로 바뀌어졌다.나는 양조장에 사는 것이 한없이 부끄러웠고 치욕스러웠다.
그러나 양조장집 딸은 운명적으로 술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일까.남편을 만났을때 나는 이미 운명의 전주(前奏)를 예감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기계소리가 시끄럽다.여느 때처럼 덜덜덜 요란한 소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다.
밀 찌는 냄새가 진동한다.여기서 살 적에는 잘 맡아지질 않았던 냄새다.찐빵을 구울 때 처럼 고소하면서도 시큼한 술냄새가 섞여,역하지는 않지만 좋을 것도 없다.막걸리를 넣고 빵을 구우면 꼭 이런 냄새가 난다.베이킹파우더라는 게 없을 때였다.
적당히 발효된 술이 계란을 섞은 밀가루와 함께 부풀려져 납작한 프라이팬 모양으로 만들어지면 어머니는 칼로 당구장 표시 같은 엑스자를 그려 넣었다.그러나 엑스자는 늘 한쪽으로 기울어져있었다. 가장 큰 세모꼴의 찐빵은 오빠에게로,그리고 그 다음 것은 내게로,가장 작은 것은 당신의 입에 넣었다.아버지는 간식으로 다른 것을 준비하셨는데 다름아닌 .단술'이란 것이었다.
그것은 요구르트 맛이 났다.어릴 적에는 아버지가 몰래 요구르트 같은 걸 만들어 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나는 다시 우물가로 나간다.허리를 꺾어 깊은 우물을 들여다본다.
“어릴 적 생각이 나는 모양이구나.” 허리를 펴고 돌아보니 어머니가 서 있다.
어머니는 또 한숨처럼 말을 꺼낸다 “어디라도 좋으니 네가 이하늘 밑에만 있었으면 좋겠어.” “저도 그러고 싶어요.하지만…….” 나는 말을 잇지 못한다.
“사람은 저 혼자서는 못사는 법이다.그게 생리야.” “결국 어딜가도 혼자이게 마련이에요.평생 아버지와 사시면서도 그걸 모르세요? 한번이라도 외롭지 않은 적이 있으셨냔 말이에요?” “차라리 칼로 도마를 썰지,네 고집을 어떻게 막겠냐.그래,갈 테면 가거라.” 소리내어 문을 닫고 나가는 어머니의 뒷 모습.
***45면에 계속 글=은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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